‘계산바둑의 혈투’

박영훈(21)과 안조영(27)이 17일부터 제17기 기성전 도전 5번기에 돌입한다.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등이 모조리 빠진 이색적인 결승전 조합. 지난해 최철한에게 도전, 최종국서 혼신의 힘으로 ‘반 집승’을 이끌어내며 타이틀을 탈취했던 기억이 새롭다. 안조영은 김주호 이세돌 송태곤 등 강호들을 줄줄이 연파하고 올해 도전권을 따냈다.
박영훈은 국내 타이틀 수에서 현재 지분율 2위에 올라 있는 기사. 국제 대회서도 두 차례나 정상에 섰으니 나이가 무색할 만큼 관록을 갖췄다. 반면 과거 세 차례 도전 무대에 나섰다가 번번이 이창호에 가로막혀 준우승에 그쳤던 안조영은 신인 기전 2회 우승 경력만으론 상쇄할 수 없는 한을 품고 있다. 이번 도전기는 그래서 ‘젊음의 관록’과 ‘중견의 패기’라는, 서로 엇갈린 콘셉트로 치러질 전망이다. 국내 랭킹 4위의 박영훈으로선 이번 도전기에 진퇴가 걸려 있다. 유일한 도전제 타이틀을 잃을 경우 내년 국제대회 출전 시드마저 불확실해진다. 기성을 거점으로 확보해 두어야 다른 무대의 공성(功城)도 수월하다. 하지만 절박하기로 말하자면 안조영(8위)도 마찬가지. 30대 진입이 눈앞인데, 이번에도 첫 우승에 실패한다면 언제 다시 기회가 찾아올지 기약이 없다.

기풍 면에서 보더라도 흥미로운 결승전이다. 박영훈은 누구보다도 계산과 끝내기가 밝은 ‘신형 컴퓨터’로 떠오르고 있다. ‘신산’이란 별명으로 불리어온 이창호조차 “종반은 나를 넘어선 것 같다”고 말할 정도. 그러나 안조영의 별명은 아예 ‘반 집의 승부사’다. 끈적끈적하게 버티면서 미세한 바둑을 극적으로 이겨내는 솜씨가 남다르다. 화끈한 대형 전투보다는 ‘미생물학적’ 계산 다툼이 펼쳐지리란 예상도 그래서 나온다.
최근 컨디션 면에선 안조영이 좋아 보인다. 올 들어 9연승을 곁들이며 11승 2패로 다승 3위를 달리고 있다. 그 와중에 기성 도전권을 따냈고, 전자랜드배 백호부를 제패했으며, 국제 대회인 강원랜드배에선 천금의 2연승으로 한국 팀의 구세주 역할을 해냈다. 박영훈이 올 시즌 6승 5패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의외. 이창호와의 십단전 결승서 1대2로 패한 뒤 맥심배에선 준결 고비서 막히더니, 11일엔 춘란배 첫판서 통한의 반 집 패를 당했다. 분위기를 일신해야 할 시점이다. 상대 통산 전적은 박영훈이 3승 2패로 우세. 한때 안조영이 2대1로 역전시켰다가 다시 박영훈이 2연승한 일진일퇴의 흐름이다. 5국 중 딱 한 판(2002년 패왕전) 반 집 승부가 연출됐고 그때는 안조영이 백으로 이겼다. “형, 나 무지 바쁘거든요? 허리춤 좀 잡지 말아요.” “영훈아, 너는 웬만큼 해봤지 않니? 이번엔 나도 타이틀 한 번 꼭 먹어 볼란다.” 1인당 각 4시간에 우승 상금은 180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