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 메마른 현실… 조선족 여인을 울리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베이징 외곽의 작은 기차역 주변, 조선족 최순희는 김치 장사를 하며 아들 창호와 단둘이 팍팍하게 살아간다. 같은 조선족 출신이라며 접근해온 유부남 김씨에게 정을 주지만, 부인에게 현장을 들킨 김씨는 그녀를 매춘부로 몰아버린다. 식당 사장은 김치를 납품하는 대가로 그녀의 몸을 탐하고, 노점상 허가증을 준 단골손님 왕 경찰도 그녀가 궁지로 몰리자 성관계를 요구한다. 어느 하나 그녀 편이 없지만, 최순희는 꺼억꺼억 울분을 토하지도,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에 지칠 대로 지친 그녀 앞에선 고난조차 모래알처럼 맥없이 부서져버린다. 그러나 아들 영호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자 최순희는 단단히 채웠던 울분의 고삐를 풀고 세상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 ‘망종(芒種)’은 씨앗을 뿌리는 절기를 뜻하는 ‘희망적인’ 제목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황폐함을 질주한다. 감독은 메마른 현실을 물기 한 방울 없는 딱딱한 카메라로 바라보면서 리얼리티를 극대화한다. 감정이입을 종용하는 음악이나 화려한 영상은 철저히 배제됐고, 날 것 그대로의 고통이 스크린에 저며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불편한 슬픔’을 고스란히 마주쳐야 한다.
김치 파는 조선족 여인을 그린 조선족 감독의 영화라는 외면적인 포장 탓에 언뜻 재중동포의 인권 문제를 다룬 영화를 떠올리게 되지만, ‘망종’은 그를 넘어서 산업화의 이면에서 소외된 이들의 일상, 모호한 경계에게 살고 있는 소수민족의 고민을 포괄적으로 담아냈다. 이같은 비주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벨기에 시네마 노보 영화제 대상, 지난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상, 프랑스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 ACID상 등으로 빛을 발했다.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