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시… 그러나 강렬하게 우리곁에 온 ‘재팬 무비’

12일 오후 3시 40분 서울 명동 CQN 극장 앞 도로가 500여명의 군중으로 꽉 막혔다. “에리짱 카와이!” 변성기를 막 지난 것 같은 남학생의 깔깔한 목소리가 여기저기 들렸다. 북새통 속에서 경찰의 호위를 받고 극장으로 일본 영화 ‘박치기’의 주인공 사와지리 에리카가 들어선다.
같은 날 오후 4시 서울 신촌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 1000여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메종 드 히미코’의 이누도 잇신 감독과 이 영화에서 게이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꽃미남 배우’ 오다기리 조가 무대에 오르자, 여성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최근 극장가엔 일본 영화의 조용한 반란이 감지되고 있다. ‘박치기’와 ‘메종 드 히미코’의 감독과 배우가 겹치기 방한했고, ‘스윙걸즈’(감독 야구치 시노부)의 주인공 우에노 주리가 영화 개봉(23일)을 앞두고 서울을 방문했다. 10일 기자회견을 가진 우에노 주리는 한국 관객의 열기에 감동해 24일 한국을 다시 찾는다. 일본 배우가 영화 개봉을 전후로 두 번이나 한국을 찾는 것은 이례적이다. 지난 13일에는 야자와 아이의 순정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나나’(30일 개봉)에 출연한 일본 톱가수 나카시마 미카와 나리미야 히로키가 방한했다. 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두 주연배우 쓰마부키 사토시와 이케와키 치즈루가 함께 출연하는 일본 영화 ‘오늘의 사건사고’도 다음달 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 1998년 일본 대중문화 1차 개방 이후 ‘러브레터’ 같은 몇몇 영화가 화제를 모으긴 했지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일본 영화에 관심이 쏠린 적은 전에 없던 일이다. 영화가에 ‘일류(日流)’붐이 부는 것 아닌가라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을 정도. 그러나 평론가들의 대답은 “아직은 아니다”. 몇몇 영화에 몰린 호평을 일본 영화 전체의 붐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관객이 좋아하는 일본 영화의 패턴 변화는 분명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했다.

최근 한국에서 인기 있는 일본 영화의 공통점은 기발한 상상력에 사회성 짙은 소재를 녹여 ‘진중함’과 ‘경쾌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연출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 영화 평론가 심영섭씨는 “몇 년 전만해도 ‘이와이 슈운지’류의 소녀적 감수성을 담은 멜로 영화나 ‘미야자키 하야오’류의 철학적인 애니메이션이 인기였지만, 최근에는 엽기 발랄하고 오밀조밀한 만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일본 영화가 젊은 관객에게 먹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감정의 과잉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기발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한국 젊은이의 코드와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메종 드 히미코’는 자칫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동성애 문제를 들고 나왔지만, ‘게이 실버 타운’이라는 참신한 접근으로 웃음을 버무렸다. 정치색 짙은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룬 ‘박치기’ 역시 치기 어린 청춘의 좌충우돌 과정에 이념의 무거움을 희석시켰다. 두 영화는 마이너리티를 다룬 ‘비주류’ 영화라는 점에서도 닮았다. 문제 여학생들이 재즈 밴드를 결성하는 과정을 그린 ‘스윙걸즈’도 만화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장면이 총망라돼 있는 ‘엽기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일본 영화에 대한 짝사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측에서 한국은 중요한 ‘테스트 마켓’. ‘스윙걸즈’의 마케팅담당 손효정(포미커뮤니케이션)씨는 “일본 제작사에서 배우의 방한 스케줄을 직접 관리하는 등 홍보에 매우 신경을 쓴다. ‘역(逆)한류’를 이용하자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