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대회 ‘대화 감독관’ 첫 도입

바둑은 바둑판 없이도 대화만으로 느낌을 교환할 수 있는 게임이다. 프로들의 경우엔 서너 명만 어울려도 승착과 패착, 형세 판단, 난국 타개의 묘수 등 주요 ‘기밀’이 단숨에 걸러진다. 인간인 이상 따라오게 마련인 착각이나 오류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스포츠 경기 때 코치가 내리는 작전 지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대국 중 휴대전화를 못 받게 규제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프로 바둑계엔 아직도 ‘사각 지대’가 있다. 바로 점심 시간이다. 대국자들은 이 1시간 동안 누구와, 어디로 가서 쉬고 와도 규제 받지 않는다. 같은 학교나 도장 출신 선후배들이 주로 어울리는데 대국 얘기를 완전히 피해가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부부, 형제, 남매 기사들도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한 판에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몇 억이 왔다갔다하는 국제 대회쯤 되면 얘기는 좀더 심각해진다. 지난해 가을 베이징서 열린 10회 LG배 준결승 때 중국 구리(古力)와 대결했던 이세돌은 “바둑이 매우 복잡했는데 오후 대국 들어 상대가 완벽하게 대응해와 당황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당시 이세돌은 동행했던 박정상과, 구리는 10여명의 중국 최고수들과 각각 따로 점심을 들었다. 유창혁도 “과거 국제 대회에서 몇 번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한 방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해서 바둑 수에 관한 논의를 했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개연성만으로 남을 의심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세돌이나 유창혁의 경우 지나친 과민함 탓일 수도 있다. 거꾸로 중국이나 일본 기사가 한국 선수와 만났을 때 ‘의구심’을 느낀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재 방식이라면 이 같은 찜찜함이 모든 판, 모든 대국자들에게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는 5월 시작될 제11회 LG배 세계기왕전 본선은 이 문제와 관련해 이색적이고도 혁신적인 장치를 준비하고 있다. 출전 기사들을 소속국별로 한곳에 안내해 함께 식사를 즐기도록 하되, 바둑 수(手)에 관한 대화는 규제한다는 내용이다. 각 국가별 식사 자리엔 타국 단장이 인정하는 감독관이 합석하게 된다. 아울러 출전 기사들은 대국장 근처 검토실에 마련된 인터넷 중계 화면도 볼 수 없도록 했다.
이 소식에 접한 기사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너무 감시하는 분위기가 되는 것 아니냐”는 사람도 있고, “웬만큼 해선 100% 완벽한 예방은 불가능할 것”이란 기사들도 있다. 한편으론 상당수의 기사들이 “현행 방식은 도무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개선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시점에 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점심 입회인’ 제도의 목표는 간단하다. 승부 관리의 요체라 할 공정함을 최대한 확보해 보자는 것이다. 경쟁자를 의심하지도, 경쟁자로부터 의심 받지도 않 는 분위기가 제도적으로 마련될 때 게임으로서 바둑의 권위도 유지될 것이다. LG배 전속 해설자이기도 한 최규병 九단은 “스포츠 세계에선 약물 테스트까지 하는 세상”이라고 전제, “무조건 점잔만 뺄 게 아니라 일단 선언적 의미로라도 시작한 뒤 점차 보완해 나갈 과제”라는 의견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