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들 “스크린선 우리 세상”

2006년, 세계는 취업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68혁명과 맞먹는 격동의 시위가 올봄 재현됐던 프랑스의 실업률은 10%. 특히 청년실업률은 23%에 육박하고 있다. 유럽연합 25개국의 평균 실업률은 9%, 청년실업률은 19%다. 청년실업 60만 명의 한국과 구직자가 일자리보다 2배 이상 많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공통이 된 ‘구직자의 위기’를 반영하듯 요즘 영화엔 국내외 할 것 없이 ‘백수’ 주인공이 유독 많다.
◆취업 때문에 강도·살인까지
‘취업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살벌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액스, 취업에 관한 위험한 안내서’(6월 개봉)는 ‘해고’라는 사회적 살인에 의해 수세에 몰린 개인이 사회적 부활을 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는 모습을 그린다. 제목의 ‘액스(AX)’는 ‘도끼’란 뜻으로 ‘정리해고’와 ‘살인’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있다. 프랑스 제지공장에 다니던 40대 가장이 정리해고 당한 뒤 재취업에 실패하자 결국 취업 경쟁자를 하나씩 없애는 방법을 택한다는 내용. 장르는 블랙코미디이지만, 영화는 자못 진지하다. 결코 웃을 수 없는 절박한 현실이 눈 앞에 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0일 개봉했던 할리우드 코미디 ‘뻔뻔한 딕 앤 제인’도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려운 재취업 실상을 풍자했다. 중산층이었다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부부는 일용직과 인체실험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 급기야 은행강도로 돌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IMF 외환위기 이후 불확실한 미래를 사는 20대를 그린 청춘 영화가 꾸준히 늘고 있다. 2004년 ‘마이 제너레이션’에서 생계를 위해 각종 아르바이트를 기웃거리는 20대 커플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다뤘던 노동석 감독은 올가을에는 청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통해 꿈은 많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 앞에서 방황하는 세차 아르바이트생과 가수지망생의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역시 안정적인 직장을 갖지 못한 주변부 청춘의 이야기다.
◆독립영화 속 주인공, 백수·비정규직이 판친다
실업난을 정면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영화 속 주인공이 백수나 비정규직으로 설정되는 사례도 많아졌다. 5일 폐막하는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유운성씨는 “이번 영화제에 출품된 한국 장편영화 35편 중 30%는 백수나 비정규직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며 “90년대와는 다른 현상”이라고 말했다. 총 42개국 194편 상영작 중에서도 ‘화이트 칼라’ 주인공은 드물다는 설명이다. 주인공이 콜센터 직원(존과 제인·인도), 마사지사(마사지사·필리핀), 노점상(카트 끄는 남자·파키스탄) 등으로 설정되는 식이다. 이들 영화의 감독은 대부분 ‘20~30대’로 젊은 감독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겨냥돼 있는지를 반영한다.
서울 여성영화제도 “상영된 96편의 작품 중 7편이 ‘여성의 고용불안과 차별문제를 다룬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독립영화의 70% 이상을 배급하는 인디스토리 관계자는 “수치화 할 수는 없지만 한 해 200~300편이 쏟아지는 영화관련학부 졸업작품 중에는 취업을 고민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 많다”고 말했다.
“우리는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직업을 원한다”고 말한 프랑스 한 대학생의 말처럼 이제 다시 ‘이념’보다는 ‘생계’ 문제가 젊은 감독들의 발언권이 강한 영화계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상용씨는 “거창한 사회 문제보다는 개인이 먹고 사는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아진 오늘의 세태를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