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말하길… "달라지지 않는 오늘을 반성하세요"

그다지 멀지 않은, 동시대라고 불러도 무방할 과거에 대한 영화는 그 ‘가까움’으로 인해 현재를 뒤돌아보게 한다. 역사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그 영화들은 ‘시대의 공기’를 나름대로의 관점으로 담아내며 그 과거가 계속 지속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영화화하든가 지나간 한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드라마를 보여주든가. 그런데 영화는, 역사책이 어느 정도 오래된 과거를 정리해 묶어내는 데 비해, 다룰 수 있는 과거의 범위와 그 시각이 자유롭다. 1976년에 나온 ‘대통령의 음모’는 제작 당시 겨우 4년 전에 일어난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올리버 스톤의 ‘JFK’는 케네디 암살에 대한 공식적 견해를 완전히 뒤집기도 한다.
이처럼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을 다루지 않더라도, 영화는 가까운 과거를 간접적이지만 본질적으로 보여준다. 1998년 IMF 구제금융 시기 부산의 마약조직과 그들을 뒤쫓는 한 경찰의 이야기인 ‘사생결단’은 아직도 유효한 ‘지속되는 과거’의 영화다. 범죄영화 장르 속에 있지만, 이 영화는 남한의 세기말 풍경과 그 시대정신을 이야기한다. 그 시기 우리는 어땠는가. 우린 우리가 믿어왔던 소박한 가치관들이 눈앞에서 붕괴하는 걸 목격했다. ‘사생결단’은 그 시절을 약육강식의 논리가 횡행하는 마약 커넥션을 통해 상징한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류승범과 황정민이 참여한 노래 ‘누구를 위한 삶인가’는 관객에 대한 날 선 질문이다. ‘포스트 IMF’의 황량한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인가. 8년 전 과거라고 방치하기엔, 현재까지도 꽤나 큰 울림이 있는 물음이다.

‘살인의 추억’은 어느 연쇄살인사건을 통해 80년대라는 ‘빙하기’를 형상화한다. 범인 잡을 경찰은 시위현장에 동원되고, 등화관제 때문에 온 마을이 어둠에 잠겼을 때 처참한 살인이 일어났던 시기. 이 영화는 ‘군사독재’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표현되는 80년대를 꼼꼼한 디테일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로 만들면서, 반복되는 살인을 막지 못했던 총체적 무능의 시대를 보여준다. 80년대에 대한 또 한 편의 시대정신이라면 ‘바보선언’을 들 수 있다. “옛날 한 옛날 20세기가 끝날 무렵, 우리나라에 동칠이라는 바보 같은 어른이 살았습니다”라는 꼬마 아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바보선언’은, 1984년의 시점에서 ‘피의 광주’ 이후 한국 사회를 천민자본주의로 이끌었던 5공화국을 우화적으로 드러낸다. 두 주인공이 여의도광장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때 저 멀리 보이는 국회의사당은, 이장호 감독의 보여준 서릿발 같은 이미지다.

윤종찬 감독의 ‘소름’은 참사로 상징되던 시대에 대한 시선이다. 아내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으로 잃었던 슬픈 개인사를 지닌 감독은, 데뷔작에서 자신의 고통을 어느 낡은 아파트로 형상화한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미금아파트 주민들은 의사소통 단절 속에 살아간다. 이 영화는 90년대의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무관심한 한국인들. 그렇다면 정윤철 감독이 ‘말아톤’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영화 ‘기념촬영’은 진혼가와도 같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친구들을 잃은 주인공. 3년 후 다리가 재개통되었을 때, 살아남은 자는 죽은 친구들을 떠올린다. 너무 쉽게 비극을 망각하는 우리들에게 이 영화는 잔잔히 가르친다. 그들의 죽음을 잊지 말자고. 그리고 다시는 그런 죽음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언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고, 인면수심의 살인마들이 태연하게 현장검증을 하고, 실업과 빈부격차는 점점 심화되고 있는, 거친 시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이러한 현실들은 한 세대도 안 되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들의 연장이며, 그런 점에서 가까운 과거를 다룬 영화들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월간 ‘스크린’ 김형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