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을 제대로 알려면 적어도 이 코스는 걸어봐야지요.”
요즘엔 덕유산(德裕山·1,614m)을 오를 때 곤돌라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원래 덕유산 산행은 삼공리의 구천동 집단시설지구에서 다리품을 팔아야 참 맛이 난다.
9천 명의 성인이 숨어살았다는 깊은 계곡 중 외구천동은 도로가 포장되면서 한 사람조차 숨어 살 곳 없을 정도로 낱낱이 드러나 신비감이 사라졌어도 내구천동은 아직도 순수 자연미가 제법 남아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중봉~오수자굴 구간은 이전엔 자연휴식년제 구간으로 묶여 있어서 산행이 불가능했으나 2002년 말 휴식년제가 해제되면서 비로소 덕유산의 정통 회귀산행코스라 할 수 있는 백련사~향적봉~중봉~오수자굴~백련사 코스 답사가 가능해졌다.
이번 산행엔 덕유산 관리사무소에 근무하는 젊은 일꾼 2명이 동행했다. 덕유산 생태에 관심이 많은 자연환경안내원 이영구씨(28)가 앞장섰고, 덕유산 홍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장수림씨(29)는 월차를 내면서까지 산행에 참가했다. 팀은 제대로 꾸려진 셈이다.
달빛 아래서 제 빛을 드러낸다는 월하탄의 시원한 물줄기를 감상하고, 인월담·사자담·다연대를 연달아 지난다. 신록으로 물들어 가는 덕유의 푸른 숲엔 붉은 산철쭉이 한창이었다. 이어 백련사 스님들이 몸과 마음을 씻던 백련담을 지나면 곧 백련사 일주문이 반긴다. 오른쪽으로는 구천동 절집의 내력을 알려주는 부도밭이 정겹다.
잠시 후 사바세계와 연을 끊는다는 이속대를 지나면 드디어 백련사(白蓮寺). 절집 주변은 지난해 여름에 수해를 입어 약간 어수선했다. 올 여름 안엔 모두 복구할 예정이란다.
공사 중인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세속을 떠난 듯 깊은 산중이다. 늦봄의 숲은 더 없이 한적하고 고즈넉하기만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숲은 정말 활력이 넘쳤다. 여름이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검은등뻐꾸기가 지저귀고, 먹이를 찾는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는 백련사 스님의 목탁 소리를 닮았다. 참나무를 쪼르르 기어오르는 아기 다람쥐도 반갑다.
6월 초에도 철쭉꽃 볼 수 있어
고도를 높일수록 5월 초순의 숲은 연둣빛이 적어진다. 신갈나무·쇠물푸레·당단풍나무는 아직 싹도 나기 전이다. 산정이 가까워질수록 주목, 구상나무 같은 침엽상록수들이 얼굴을 자주 내밀었다. 산 아래의 철쭉은 이미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고 산중턱은 꽃봉오리가 부풀기 직전이었지만,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꽃눈은 점차 작아지더니 향적봉이 보일 즈음엔 아예 잎눈조차 피지 않은 채였다. 그 대신 붉은 털진달래꽃이 여기저기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덕유산 철쭉은 보통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절정을 이루지요.”
동행한 이영구씨는 올핸 봄이 조금 늦었기 때문에 정상 부근에선 6월 초순에도 철쭉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반딧불 축제가 열리는 6월3~11일 사이에도 철쭉을 만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행사 첫째 주말인 3~4일에 덕유산을 찾아야 철쭉을 제대로 볼 수 있을 듯했다.
“혹시 철쭉이 진다해도 6월엔 완벽하게 신록으로 뒤덮일 겁니다. 지금보다 훨씬 아름답죠.”
장수림씨도 덕유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 마디 거들었다.
어쨌든 백련사에서 1시간30분을 걸어서 도착한 향적봉의 조망은 계절에 상관없이 정말 일품이다. 동쪽으론 우뚝 선 가야산(1,430m)이 손에 잡힐 듯하고, 남쪽으론 백두대간 첩첩 산줄기 너머로 지리산(1,915m)의 장한 모습이 아련하다.
향적봉 정상엔 탐방객들이 제법 많았다. 대부분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이용해 올라온 듯하다. 곤돌라를 타면 힘이 부치는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도 어렵지 않게 높은 능선에 펼쳐진 하늘 화원을 거닐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반딧불 축제 때 아이들과 동행했다면 산행 시간만 7시간 내외가 걸리는 원점회귀 코스보다는 곤돌라를 타고 오르는 게 현실적으로 낫다. 곤돌라를 이용해 향적봉에서 오른 다음 백련사로 내려가면서 내구천동을 감상하면 되기 때문.
또 하산 코스는 3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므로 당일치기로 반딧불 축제와 덕유산 산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아무래도 곤돌라가 요긴할지도 모르겠다.
삼공리 집단시설지구~백련사~향적봉~중봉~오수자굴~백련사~삼공리 코스는 산행시간만 6~7시간 걸린다. 이 코스는 향적봉 대피소에서 15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샘물 외에는 물을 구할 데가 없기 때문에 백련사에서 수통에 물을 채워야 한다. 입장료 어른 3,200원, 청소년 1,200원, 어린이 600원. 주차료 4,000원.
노약자와 동행했을 때는 무주리조트에서 설천봉까지 운행하는 곤돌라를 이용하면 좋다. 곤돌라는 토·일요일엔 09:30(평일 10:00)부터 16:00(금·토요일 16:30)까지 운행한다. 왕복권 어른 10,000원, 어린이 7,000원. 편도권은 어른 6,000원, 어린이 3,500원. 국립공원 입장료와 주차료를 받지 않는다.
무주구천동(삼공리)~무주리조트 구간은 무료 셔틀버스가 1일 12회(05:40, 08:00, 08:30, 10:00, 11:30, 13:30, 14:30, 16:00, 17:30, 18:40, 19:20, 20:45) 운행한다. 10분 소요.
#숙박
덕유산 정상 부근에 있는 향적봉대피소(063-322-1614)에서 묵으면 향적봉의 일몰과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객실은 2층 목조침상이다. 1박 7,000원, 담요 대여료 1,000원. 삼공리엔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직접 운영하는 통나무집이 있다. 11평형(4~5명) 65,000원, 15평형(7~8명) 80,000원. 국립공원 입장료는 별도로 지불해야 한다.
구천동 관광단지엔 알프스산장(063-322-2350), 구천장(063-322-0880), 귀빈장(063-322-3434), 낙원산장(063-322-3155), 신라모텔(063-322-3089), 덕유산장(063-322-3074) 등 30~40개의 장급 여관과 민박이 있다.
#별미
-보쌈
삼공리 관광단지에 있는 원조할매보쌈(063-322-2188)이 유명하다. 부드러운 돼지수육을 맛깔스런 배추김치에 싸먹는 맛이 일품. 두릅, 곰취 등 각종 봄나물을 비롯해 계란찜, 된장찌개 등 20여 가지 반찬이 나온다. 보쌈정식 1인분 10,000원.
-송어회
구천동계곡 안쪽에 자리한 덕유산휴게소(063-322-3121)는 하산길에 들르기도 좋다. 구천동을 찾는 사람들이 드물던 1963년 당시 이곳에 처음 들어온 오옥현 할머니(76)가 손수 키운 송어를 내놓는다. 송어회 대 40,000원, 중 35,000원, 소 30,000원.
#교통
서울→구천동 남부터미널에서 매일 1회(08:30) 운행. 3시간20분 소요, 요금 14,600원.
대전→구천동 동부터미널에서 매일 9회(07:10~19:40) 운행. 2시간40분 소요, 요금 6.800원.
전주→구천동 공용터미널에서 매일 7회(08:30~16:40) 운행. 3시간 소요, 요금 10,000원.
무주→무주리조트→구천동 공용터미널에서 매일 17회(07:25~22:15) 운행. 50분 소요, 요금 3,000원.
드라이브 코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무주 나들목→19번 국도(진안·장수 방면)→적상→49번 국지도→37번 국도(거창 방면)→무주구천동(무주 나들목에서 30분 소요) / 무주읍내 반딧불 축제행사장→37번 국도(거창 방면)→17km→설천→나제통문(우회전)→무주구천동.
*덕유산국립공원사무소 홈페이지 www.npa.or.kr/togyu
*본소 063-322-3174～5
*삼공매표소 063-322-3473
*무주리조트 063-322-9000
향적봉에서 중봉(中峰·1,594m)으로 방향을 잡았다. 산길은 육산(肉山)인 덕유산의 넉넉한 모습을 증명이라도 하듯 완만하다. 땀을 잔뜩 흘리며 올라올 때의 고생을 충분히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산 아래의 도시는 한낮이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는 초여름 날씨. 그러나 해발 1,500~1,600m를 넘나드는 아고산대(亞高山帶)인 덕유산 능선마루는 이제야 겨울이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주목과 구상나무의 짙은 녹색, 호랑버들과 신갈나무의 연둣빛 신록, 거기에 산기슭에 드문드문 자라고 있는 산벚나무의 연분홍 꽃구름이 만들어내는 색상의 조화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뭐니 뭐니 해도 덕유산 산행의 백미는 들꽃 감상입니다.”
올라오는 내내 틈날 때마다 디지털카메라로 숲속의 들꽃을 찍던 이씨가 다시 감탄사를 터뜨렸다. 향적봉대피소 주변은 보랏빛 꽃을 피운 처녀치마가 지천이었다. 처녀치마란 주름치마처럼 생긴 통꽃들이 고개를 숙인 듯 피어나기 때문에 얻은 이름. 보통 3~4월에 피어나지만, 덕유산 같은 고지대에선 5월이 돼야 한창이다. 5월 중순 이후엔 지기 때문에 아쉽게도 반딧불 축제 기간엔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볼 수 없다. 대신 초여름엔 털쥐손이풀, 말나리 등이 지천일 것이라는 게 이씨의 위로다.
중봉과 덕유평전(德裕平田·1,480m) 주변은 털진달래꽃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같이 높은 산꼭대기에서 자라는 털진달래는 일반 진달래보다 무려 한 달쯤 늦게 꽃을 피운다. 꽃 색깔은 진달래보다 조금 더 붉은 편이다. 이곳의 털진달래꽃은 5월20일을 전후해 절정을 이루기 때문에 아쉽게도 반딧불 축제 때는 볼 수가 없다.
인적 드물어 호젓한 오수자굴 코스
중봉에서 오수자굴로 방향을 잡았다. 길은 키 작은 털진달래나무 사이로 이어진다. 완만한 산길을 10여 분 내려서자 산죽 뒤덮인 산길이 시작된다. 올라오는 이가 있다면 한쪽으로 비껴 줘야 할 정도로 가파르고 좁았다. 계단 등 인공구조물이 적어 자연스런 맛이 살아있는 이 구간은 원점회귀코스 중 가장 힘들고 험한 곳으로 꼽힌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산을 좋아하는 골수 산꾼들은 이 코스를 아끼고 사랑한다.
중봉을 떠난 지 30여 분만에 오수자굴에 도착했다. 이 굴은 오수자라는 스님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자 이곳에 들어와 도를 닦던 곳이라 한다. 마치 거대한 고래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생긴 오수자굴 입구는 허리를 굽혀야 할 만큼 낮았으나 굴 안은 수십 명이 동시에 서있을 정도로 널찍했다.
오수자굴 바위 천장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여름엔 이보다 시원한 곳이 없을 듯했다. 겨울엔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이 얼어붙으면서 마치 석회동굴의 석순처럼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이 되는 특이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오수자굴에서 너덜길을 10분쯤 내려서면 비로소 경사가 완만해지며 구천동계곡 최상류인 맑은 계류를 만난다. 계류를 오른쪽에 끼고 이어지는 산길은 너덜이 깔린 거친 길과 고운 흙이 덮인 부드러운 길이 번갈아 나타났다. 호젓할 뿐만 아니라 경사도 아주 완만해 정말로 오솔길을 산책하는 듯했다. 이런 분위기는 백련사를 만나기까지 50여 분 내내 이어졌다.
백련사에서 다시 구천동계곡 옆길을 따라 걸어가면 산행 시작점인 삼공리 매표소에 닿는다. 이속대·안심대·금포탄 등 올라오는 길에 자세히 살피지 못했던 33경의 명소들은 이렇게 하산길에 보는 게 좋다. 쉬엄쉬엄 1시간쯤 걷자 아침에 오를 때 눈길만 주고 말았던 월하탄의 시원한 물줄기가 두 팔 벌려 일행을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