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혜의 유행유감] 꼭 닮은 월드컵과 영화

축구가 엄청난 유행이긴 한가보다. 아파트 근처 놀이터에서 동네 꼬마들이 제법빠른 발놀림으로 축구하는 것을 최근에 여러번 보았는데, 엊그제 주말엔 옐로우 카드를 들고 다니는 아이까지 있었다. 아마도 전날 스위스전 여파인 듯. 일곱 살 먹은 조카도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축구화를 사달라며 "이모, 나도 슛돌이에 들어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설마가 4강’ 됐던 2002년에 비해 더욱더 강화되고 준비된 월드컵 마케팅의 열기는 알게 모르게 그렇게 생활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6월 한 달은 너나 할 것 없이 온통 어딜 가나 월드컵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고개만 들면 빨간색을 만났고 누구나 꾀꼬리 같은 아리랑 합창단 이었다. 월드컵 특수를 노린 감성 광고들의 매 게임 결과에 따른 발빠른 컨셉트 이동은 안정환 선수의 슛보다도 빨랐고, 채널만 돌리면 나오는 모든 방송들은 특집의 이름으로 꾸며져 있어 하루하루가 국경일 같기도 했다. 열심히 싸웠고 뜨거운 감동을 주었던 스위스 전. 아쉬운 패배로 16강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렇게 끈끈한 땀과 눈물로채워졌던시간들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기면서 다시 4년 뒤에 다가올 그날을 기약하고 있다. 억울한 건 못 참는 우리국민에게 스위스전의 심판이 보여준 찜찜한 판정은 재경기 요구로까지 번졌으며 과열된 흥분은 당분간 ‘서울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속상한 마음일 텐데도 “심판의 판정도 경기의 일부다”라는 박지성 선수의 의젓한 한마디는 이번 월드컵이 남긴 최고의 명언이라고 해도 누구 하나 태클을 걸지 못할 것이다. 심판의 권한을 인정한다는 얄밉도록 논리적인 글과 ‘먹다 만 명태 머리’처럼 생겼다는 심판에 대한 인신공격까지 퍼부으며울분을 토하는 분노의 글까지, 극과 극을 달리며 게시판이 뜨겁지만, 그것 또한 월드컵 후유증이라는 또 하나의 장외경기 일부가 아닐까 생각한다.

준비기간을 포함한 월드컵 관련 행사들이 16강 불발의 날로부터 서서히 그 열기가 정리되는 분위기를 보면서 안팎이 참 ‘영화적’이란 생각을 했다. 감독과 주연배우라는 전면에 나선 공격수들과 그들이 슛을 쏠 수 있도록 애쓰는 조연배우와 스텝이라는 수비수들의 숨은 노력들, 그리고 그것의 결정체인 필름을 극장에 공개하며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불꽃 튀는 흥행경쟁까지 꼭 닮아 있다. 때로는 흥행을 보증했던 영화들이 성과를 못 내기도 하고 관심 밖에 있던 영화가 예측불허의 성공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결국엔 “보자, 말자, 권한다, 강추다”로 치열하게 오르내리는 민심을 통해 열기를 찾거나 잃기도 하는 후일담까지 정말로 닮았다. 스포츠가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것을 매번 재방송 보듯이 확인하며 골인 장면에 감동받는 것과 봐도 지치지 않는 영화 속의 명장면이 주는 뭉클함의 크기 또한 다르지 않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응원의 중심에 서야 했던 선수들, 그들이 만들어준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상황으로 온 국민이 6월 한 달을 영화적으로 살아 낸 것은 아닐까. 그래서 또다시 새로운 세팅으로 다음 영화에서는 더욱더 멋진 영상을 보여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나 감성에 호소하던 광고들도 이제 슬슬 꼬리를 감추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월드컵 마케팅이 접혀가면서 작거나 큰 아쉬움도 떨쳐버릴 수는 없다. 월드컵이 끝나면 축구도 끝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바로 그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축구가 월드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스포츠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옐로카드를 치켜들고 자신들만의 규칙을 만들어내며 놀이터를 누비는 제2, 제3의 슛돌이들에게 축구가 주는 열정과 스포츠 정신을 이어가게 해주어야 할 것 같다. 월드컵은 갔지만 축구는 남겨져야 하는 건 아닐까. (영화사 아침 대표 정승혜 blog.chosun.com/amsaja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