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북 청도군에 걸쳐 있는 비슬산(琵瑟山·1,083.6m)은 산행객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산이다. 현풍 비슬산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산은 봄이면 각종 야생화와 진달래가 산상의 화원을 이루고, 여름철에는 더위를 식힐 수 있는 깊은 계곡이 있어 좋다. 또 가을에는 서걱거리는 억새와 단풍이 수를 놓고, 겨울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능선에 설화가 만발해 산행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사계절 전천후 산행이 가능한 산이다.
1999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국립공원 지정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할 정도로 천혜의 자연경관을 지닌 비슬산. 지난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기념해 산림청이 선정한 한국 100대 명산에 꼽힌, 특히 대구·경북지역 사람들이 좋아하는 산이다. 그래서 그런지 휴일은 물론이고 평상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1986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거문고 형상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정상의 바위모양이 신선이 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비파(琵)와 거문고(瑟)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지만, 속인의 눈으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한편으로 높고 귀하다는 의미가 담긴 우리말 ‘벼슬’, ‘솟을’에서 유래했다는 설명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듯하다. 비슬이란 말은 고대 인도 힌두교의 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온 말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산자락에는 유난히 많은 사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비슬산을 일명 포산(苞山)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포산은 현풍의 옛 지명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소슬산, 비들산 등으로 불리며 이와 관련된 많은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산은 산세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현풍쪽이나 청도쪽에서 봐야 알 수 있다고 할 만큼 산행도 주로 이 두 곳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등산로는 거미줄처럼 다양하게 얽혀 있어 하이킹에서부터 10시간이 넘는 종주산행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당일산행이라면 아직도 청도쪽 보다는 대중교통편이 수월한 현풍을 들머리로 잡는 게 보편적이다.
휴양림~대견사지~정상~유가사 코스
이번 산행은 현풍에서 소재사~자연휴양림~대견사지~조화봉~월광봉~정상~유가사~주차장을 잇는 5시간 코스를 잡았다.
자연휴양림 입구 주차장에서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10여 분이면 소재사를 지나 휴양림 매표소가 나온다. 매표소를 지나면 가파른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어지지만 왼편 숲속으로 우회하는 등산로도 있다. 참꽃축제가 끝났지만 많은 등산객들로 북적대는 자연휴양림은 숲속의 집과 청소년수련장, 야영장 등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다.
도로를 따라 1km쯤 오르면 비슬산쉼터를 만나면서 갈림길에 선다. 오른편은 관기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와 연결되고, 포장도로는 조화봉 아래까지 이어진다. 산행은 직진한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면 하늘을 가리는 소나무숲이다. 곳곳에 등산로를 정비한 흔적을 볼 수 있지만, 찾는 사람이 많은 탓인지 주변이 많이 훼손돼 있다.
가파른 산길의 좌우로 시원하게 펼쳐지는 너덜지대가 유난히 많아 보인다. 사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이 너덜지대는 지난 2003년 12월 천연기념물 제435호로 지정된 ‘비슬산 암괴류’다.
오르내리는 많은 사람들로 등산로는 혼잡하다. 휴양림을 벗어나서 20여 분 오르면 특이하게도 등산로에 구급함이 설치돼 있다. 등산인을 위한 대구 달서소방서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낀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시야가 트이면서 하늘을 향한 대견사지 석탑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가파르던 산길도 다소 완만해진다.
간이화장실을 지나 올라서면 임도 갈림길. 왼편의 널찍한 길을 따라 5분이면 대견사지로 들어서는데, 소재사에서 휴양림을 거쳐 1시간30분이면 닿는다. 대견사는 현재 남아 있는 축대와 주변 흔적으로 보아 상당히 큰 규모의 신라시대 사찰로 짐작된다.
신라시대 포산(包山)이라 불린 이곳에는 관기와 도성이라는 두 성인이 수행했다는 얘기가 삼국유사 권5 포산이성(包山二聖)조에 실려 있고, 그 책을 지은 일연 스님 역시 젊은 시절 이 산자락 암자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도성 스님이 도성암과 관련 있다면, 이곳은 관기 스님이 수도한 암자가 아닐까?
남향의 절터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유두처럼 생긴 관기봉이 솟아 있고, 탑 뒤편에는 관기 스님이 수행했던 곳으로 여겨지는 암굴이 있다. 또 가까운 곳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어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식수를 제공하고 있다.
절터를 둘러보고 능선으로 이어지는 철계단을 오르면 널따란 평원이 펼쳐진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급경사 절벽으로 보이던 것과는 달리 이곳은 펑퍼짐하다. 멀리 비슬산 정상인 대견봉이 얼굴을 내밀고, 긴 능선으로 연결된 산줄기는 조화봉, 관기봉을 거쳐 남쪽으로 뻗어간다.
주능선을 중심으로 왼편의 평원과 완경사면이 진달래 군락지로, 봄철이면 달성군 주최 참꽃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30만여 평의 광활한 이 일대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온 산이 불타는 듯 붉게 물드는 것이 장관이다.
갈림길을 지나 지척에 있는 조화봉(1,057.7m)까지는 10여 분 거리다. 중간 능선에 칼바위(일명 톱바위)가 있다. 흡사 칼춤을 추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바위다. 조화봉 정상에는 정성들여 쌓은 돌탑이 있고, 안내도와 청도산악회에서 세운 표석도 있다. 굽이치는 낙동강의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해질 무렵의 정취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 대견사지가 내려다보이는 갈림길에 선다. 이제 북쪽의 비슬산 주봉인 대견봉으로 향한다.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주봉을 빤히 바라보며 능선을 따른다. 대개 능선길이 그러하듯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지만 그렇게 지겹지 않다. 간혹 보이는 야생화들이 반기기 때문이다. 진달래가 한바탕 휩쓸고 간 비슬산은 이제 화려하지도 않지만 푸르고 싱싱한 수목들이 길손을 맞는다.
한동안 키 낮은 진달래나무와 억새가 뒤섞인 산길이 이어지다가 호젓한 소나무숲 사이를 지나게 된다. 오른편의 월광봉(1,004.9m)을 에돌아 나아가면 마령재다. 오른편은 용천사, 왼편은 유가사로 가는 사거리 갈림길이다. 왼편으로 도는 오르막에서 숲을 벗어나면 돌탑이 길손을 반기고, 헐티재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둔덕길 같은 완만한 산길로 올라서면 오른편에 헬기장이 있고, 누구 것인지 모를 무덤을 지나 산정에 이른다.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삼각점이 있고, 커다란 바위 위에 대견봉이라 새긴 정상석이 버티고 있다. 그러니까 비슬산 정상은 바위로 형성돼 있다고 하겠다. 멀리 북쪽으로 대구시가지 일부가 보이고, 발아래 서편 산자락에는 유가사와 부속 암자들이 한가하게 자리하고 있다. 밋밋한 산릉과 깊이 파인 골짜기도 넉넉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정상 주변은 진달래와 억새 군락지로 특히 벼랑에 핀 진달래는 황홀하기 이를 데 없다.
정상에서 북쪽 능선으로 10분 정도 내려서면 갈림길이다. 동쪽 능선은 대구 앞산과 연결되는 능선으로, 최근 이쪽으로도 산행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왼편 능선길을 잡고 도성암쪽으로 내려가면 길은 제법 까다롭고 가파르다. 도성암 가는 길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 울창한 숲속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유가사에서 도성암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에 선다. 도성암은 도성선원이 개설되어 스님들의 수행처로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도성국사가 도성바위(도통바위) 굴 아래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암자 뒤편에는 도통바위가 있고, 도성스님이 성불했다는 굴이 있으며, 마당에는 수백년 묵었음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굽어보고 서있다.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편에 수도암이 있고, 곧장 한 굽이 숲길을 돌면 유가사(瑜伽寺)에 도착한다. 천년고찰 유가사는 한 때 본사를 제외하고 속암이 99개, 거주 승려 3천, 딸린 전답이 1천 마지기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신라시대 때는 유가종의 총본산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팔공산 동화사의 말사인데다 본사와 암자를 모두 포함해도 건물이 고작 20여 동밖에 되지 않는, 겉보기에는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찰에 불과하다. 절집을 뒤로하고 도로를 따라 5분이면 유가사 입구의 주차장에 닿는다.
글·사진= 황계복 부산시산악연맹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