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대로 평] A씨,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러 가다

1. 서설 92년 <드래곤 볼>을 읽지 않으면 간첩이던 그 시절, 관객 15만 명을 동원한 한국영화 <경마장 가는 길>에 비교되게 1백68만의 관객을 끌어 한국 영화산업의 몰락을 예견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게 만드는 위협적인 영화가 있었으니 이름하여 <사랑과 영혼>이었다. 뭐, 지금 한국에서 개봉중인 <괴물>은 8월6일 하루 동안에만 전국 72만517명을 돌파함으로 누계 관객 600만에 이르렀다 하니 <사랑과 영혼>의 기록은 지금으로 치자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리다. 그렇지만 당시로써는 많은 관객을 모은 지금의 <괴물>과 같은 인기의 영화였다. 93년 「신씨네」에 의해 이뤄진 직배영화상륙 6년간 흥행 200위 조사에서 흥행 1위 영화는 <사랑과 영혼>(1백68만3천2백63명)으로 밝혀졌고, 2위와 3위는 동아수출공사가 수입한 <원초적 본능>(1백13만명)과 <늑대와 춤을>(98만4천9백78명)이었으며 <장군의 아들>(67만8천9백46명)이 8위로 10위권 안에 든 유일한 한국영화였다. 데미 무어와 패트릭 스웨이지가 물레를 돌리며 사랑의 감정을 확인하는 장면이 나오는 이 영화로 인해 이듬해 전국 도예과의 입학성적이 전 해에 비해 15점이 오른 것만 봐도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 있지도 않았을 젊은 친구들에게 지금부터 말할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했던 사람인지 알리고 싶은 절실한 마음에 세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말하고자 하는 본론은 위와는 아무 상관없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 관한 얘기이다. 그런데 왜 <사랑과 영혼>얘기를 이리 오래 했냐고? 그렇다. 지금 런던 웨스트엔드의 피카딜리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는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에서 우리는 그 유명했던 패트릭 스웨이지를 다시 볼 수 있다. 이제는 늙고 주름진, 그러나 아직은 어린 듯 껄렁껄렁한 건달의 모습으로 말이다.

2. <아가씨와 건달들>을 보러 가다. 맨하튼의 브로드웨이나 런던의 웨스트엔드 그리고 서울의 대학로에서도 뮤지컬을 봤지만 난 개인적으로 며칠 전 이 공연이 패트릭 스웨이지 때문에라도 최고였다고 말한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반쯤 찌그러진 덜 떨어진 건달의 얼굴로 등장하자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휘파람이며 박수며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역시 그였다. 이 뉴욕의 건달들은 런던(극본상 배경은 뉴욕이다)까지 와서 정신 못 차리고 도박이나 하며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하나 잡지 못해 갈팡질팡 했다. 우리의 스타 나싼(패트릭 스웨이지)군 역시 그들 중 하나로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 친구 아들레이드(클레어 스위니)에게 ‘이제는 변할 거야’라고 말한 지 14년째이다. 모든 남녀관계의 공식이듯 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혹시 변할 수도 있다’는 그 희망 하나로 아들레이드는 끊임없이 그를 사랑한다. 그러는 와중에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로 널리 알려진 세계의 스타 아담 쿠퍼는 지금껏 내기에서 한번도 져본 적이 없는 유명한 도박사 스카이 매스터슨으로 분해 나싼과 도박을 한다. 나싼은 ‘스카이가 선교사 사라 브라운(켈리 프라이스)을 데리고 하바나에 갔다 올 수 있을 것인가’라는 내기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1천 달러를 건다. 이런 스토리에 익숙한 관객들은 남녀 사이에 흔히 생기는 오해가 있고 그렇게 오해와 그에 항상 동반되는 사랑의 재확인 등의 과정을 통해 다시 행복한 삶을 이어가겠구나 생각할 것이다. 딩동댕 정답. 결국은 대부분의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가 그렇듯 나싼과 아들레이드, 스카이와 사라의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뮤지컬을 보는데 음악과 무대를 평해야겠지만서도 먼저 몇 년 있으면 곧 환갑이 되는 이 고전(古典)격 뮤지컬의 내용에 대해 약간만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겠다. 아무리 바다 건너 산 넘어 시대와 인종, 나이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지만 사랑한다면 일단 ‘오늘 이 남자와 결혼하고(Marry the man today)’ 그 다음에 서서히 바꿔나가면 된다는 얘기를 하는 이 뮤지컬은 ‘착하게 살면 언젠가 왕자가 찾아온다’는 디즈니 만화의 주제 만큼이나 황당하다. 남자는, 아니 남자뿐만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바뀐다는 것은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옛말이 알려주듯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어르신들 말 틀린 것 ‘거의’ 없다는 것은 비행 청소년들조차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물론 사랑의 또 다른 습성 ‘알고도 빠져들기’ 때문에 우리는 믿고 빠지고 실패하고 또 믿고 또 빠지고 만다. 이 뮤지컬이 이러한 ‘가능성은 없으나 희망적이기는 한 믿음’이라는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을 재미있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면 짝짝짝. 그렇지만 자칫하면 공감하며 ‘결혼하고 바꾸면 되겠구나’라고 관객들이 생각하게 만든다면 이 뮤지컬 상연에 대해 좀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다. 여하튼 패트릭 스웨이지가 나왔으니 괜찮다. 그렇지만 사실상 관객들이 하나같이 칭찬한 배우는 아들레이드 역을 완벽히 소화해낸 클레어 스위니였다. 한국에서는 ‘탄식의 노래’로 잘 알려져 있는 ‘Adelaide's lament’를 부르며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서도 시집도 못 가고 있는 노처녀의 감기는 고칠 수도 없다’며 훌쩍거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또한 나이트 클럽 댄서로 ‘당신이 준 밍크 가져가요(Take back your mink)’를 부르며 윗옷을 벗는 열연을 펼치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강렬해서 가슴이 뭉클할 정도다. 그러나 사랑에 굶주린 입장에서 가장 감동적인 곡을 뽑으라면 스카이와 사라가 부르는 ‘나는 전에 한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네(I’ve never been in love before)’이다. 둘이 사랑을 확인하며 부르는 이 곡은 유쾌하면서도 절실하며 감동적이었다.

<아가씨와 건달들>은 1950년 뉴욕에서 처음 상연된 이후 55년 영화로 만들어져 프랭크 시나트라(스카이 마스터 역)와 말론 브란도(나싼 역) 등의 유명 배우가 출연할 정도로 전세계의 사랑을 받아온 뮤지컬이다. 물론 패트릭 스웨이지의 춤과 노래는 이미 영화 <더티댄싱>에서 인정받은 받은 바이지만 말론 브란도에 비교되는 패트릭 스웨이지의 나싼은 너무나 철없고 어색했다. 물론 수십 번 찍어 가장 잘 나온 그 한 컷을 고를 수 있는 영화와 스펙타클한 무대, 오케스트라의 실연, 배우와의 직접소통을 가능케 하는 등의 장점을 가진 뮤지컬을 비교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론 브란도나 패트릭 스웨이지가 한때를 풍미했던 헐리우드 영화배우라는 사실을 미루어 두 인물만 비교하자면 역시 우리의 영원한 <대부> 말론 브란도의 카리스마는 어떠한 역에서도 감춰질 수 없는 것이었다.

3. 그래도 패트릭 스웨이지는 훌륭했다 1928년 4월 27일 문을 연 피카딜리 극장은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음향시설은 여느 극장에 뒤지지 않으며 극장이 크지 않아 1층부터 3층까지 어디에 앉든 좋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작년 이완 맥그리거를 시작으로 헐리우드 스타들을 기용해 인기를 끌고 있는 피카딜리 극장의 <아가씨와 건달들>은 앙드레 김봉남 아저씨의 말을 빌려 한마디로 ‘판따스틱’했다. 처음에 자리에 앉았을 때 헬리콥터까지 나오던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 비교되는 작은 무대 때문에 한숨부터 나오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무대는 이 뮤지컬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잠실 경기장에서 열렸던 출연진만 750명이 넘는 초대형 공연 <카르멘>을 보며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들던 배신감도 이 곳에서는 있을 수 없었다. 작은 무대였지만 이제는 30대가 40대가 된 이들이 지금의 어린 친구들이 동방신기를 좋아하듯, SS501를 좋아하듯 열렬히 추종하던 헐리우드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가 있었고, <백조의 호수>의 아담 쿠퍼, 뛰어난 연기와 음악을 보여준 아들레이드 역의 클레어 스위니와 순진하고 바보 같은 선교단원 역을 잘 소화한 켈리 프라이스가 있었으며, 다시는 볼 수 없을 춤과 노래 그리고 열정, 절대로 사그라들지 않을 관객의 열기가 있었다. ※ 패트릭 스웨이지의 <아가씨와 건달들>은 피카딜리 서커스에 위치한 피카딜리 극장에서 9월 23일까지 상연될 예정이다. 아침 일찍 극장 앞에 가서 줄을 서고 기다려 10시에 표를 사면 20파운드에 좋은 표를 구입할 수 있다. 관련 홈페이지: http://www.piccadillytheatre.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