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씁쓸함에 고개 떨궈도 사랑밖에 난 몰라"

영화도 의류만큼이나 계절을 타는 상품이다 보니, 서서히 가을로 접어들고 있는 요즘 극장가엔 서서히 ‘사랑’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부터 밋밋한 로맨스는 너무 평범하기에 거부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된 ‘지독한 사랑의 연대기’는 올가을에도 찾아왔다.
사랑이 뭐냐고? 부모 세대의 언어를 빌자면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요, ‘7080’ 식으로 표현하자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는 절규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라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읊조리는 음유시인도 있었다. 그렇다. 사랑은 절대로 “하늘에 구름이 솜사탕이 아닐까? 착각하는 그런 달콤함이 아니다. 그건 고통이며, 가끔은 처절하기도 하고, 집착 혹은 망상과 뒤섞여 종잡을 수 없을 때도 있다.

벌써 10년이 된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은 그 제목으로 모든 것을 말한다. 시인과 기자로 만난 영민과 영희. 첫 만남부터 눈이 맞은 그들은 어느 바닷가에 허름한 셋방을 얻어 함께 산다. 유부남의 불륜담이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는 칙칙함과는 거리가 멀다. 화면은 아름답고, 러브신은 아기자기하다. 문제는 그들의 작지만 치명적인 소망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같은 이불 안에 있는 것. 생각해 보면 모든 ‘지독한 사랑’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렇다고 모든 불륜 이야기가 이 영화처럼 아름답게 채색되는 건 아니다. 여동생의 애인과 사랑에 빠지는 ‘정사’는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서글픔과 너무 늦게 찾아온 사랑 사이의 갈등이다. 이미숙의 관록 깊은 연기는, 이 영화를 중산층 여성의 사치스러운 고민에서 벗어나 깊은 불안감과 떨림의 세계로 이끈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비행기를 타는 판타지의 주인공이 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 또한, 겉으로는 얌전한 것 같지만 꽤나 위험한(?) 유부녀. “여자에게도 첩이 필요하다”고 조용히 주장하는 그녀의 사랑은, 결국은 감정의 앙금만을 남긴 채 끝나는 것 같지만, 그 옥탑방을 다시 찾는다.

아마도 가장 지독한 연애담이라면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 보여준 “때리고 맞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오아시스’의 종두와 공주를 능가하는 커플은 없다. 뇌성마비 장애우 여성을 사랑하는 전과자 종두. 그에게 그녀는 이름 그대로 ‘공주’다. 그는 한밤의 고가도로에서 그녀를 얼싸 안고 기쁨에 들뜨고, 그녀를 괴롭히는 나뭇가지를 잘라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간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위에서 질주하는 이 러브스토리는,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좋아한다는 감정의 가장 순수한 결정체를 추출하기 위한 화학실험과도 같다.
신작인 ‘시간’과 ‘해변의 여인’만을 보고 속단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한때 김기덕과 홍상수의 사랑은 그렇게 말랑말랑하지 않았다. ‘나쁜 남자’의 한기와 ‘강원도의 힘’의 상권을 기억하시는지. 그들의 집착은 한 여자의 운명과 얽히고, 그들의 사랑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일반적인 사랑의 모습을 거부한다.

올 가을 지독한 사랑의 주인공은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줄여서 ‘연애참’의 영운과 연아다. 이 영화의 질퍽한 정서는 ‘서민적 불륜’이었던 ‘우묵배미의 사랑’의 소박하면서도 징그러운 사랑을 연상시킨다. ‘연애참’의 ‘드센 여자’ 연아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영운을 꼬신다. ‘찌질한’ 남자 영운은 그녀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4년이 흘렀다. 영운은 어머니가 점지해준 얌전한 규수 수경과 결혼해야 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연아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김해곤 감독은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 했지만 사랑, 아니 연애의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랑 앞에서 ‘쿨’할 수 있다고? 그건 거짓말이다. 우린 사랑 앞에서 모두 치사해지고, 가끔은 지독해지니까.
(월간 ‘스크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