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 따라 가는 산행] 정선 아리랑제 & 가리왕산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오늘도 애잔한 아리랑 노랫가락 울려퍼지는 정선은 화전민들이 산골마다 들어가 움을 틀고 신산한 삶을 이어가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조선 건국 무렵 고려의 충신들이 이 깊은 산골에 숨어살면서 겪었던 고난의 심정을 읊은 한시를 정선에 구전되던 토착 민요에 의탁해 불렀던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다. 첩첩 산골에서만 들을 수 있던 그 아리랑이 한반도를 뛰어 넘어 이제는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매년 가을 정선 일대에서 펼쳐지는 정선아리랑제가 그것이다. 올 가을에는 이 축제에서 배운 아리랑 노랫가락 흥얼거리며 가리왕산을 올라보자.


# 정선 아리랑제

세계화를 꿈꾸는 세계아리랑축제
9월29일부터 10월2일까지 4일간 열려

‘별유천지, 정선에 가면 특별한 것이 있다' 호남의 진도아리랑, 영남의 밀양아리랑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의 하나로 꼽히는 정선아리랑의 고을인 강원도 정선은 오로지 아리랑 하나만으로도 정말 특별한 고을이다.

▲ 정선아리랑예술단이 펼치는 공연.(왼쪽) 정선아리랑제에서는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오른쪽)

우리나라 3대 아리랑에 꼽히는 정선아리랑

조선 개국 초기에 고려 왕조의 충신들이 정선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옮겨와 은거하면서 송도 시절을 회상하며 지어 읊던 한시가 원래부터 이 고을에서 불려오던 토속구전민요에 후렴을 달아 불리던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이라고 한다. 유장하고 한스러운 것이 특색이지만, 단순히 한에 그치지 않고 승화의 차원까지 끌어올려졌다는 데 가치가 있다.

요즘에도 정선 주민들은 정선아리랑 한 가락을 못하는 이가 없을 정도인데, 제법 그럴 듯한 소리를 내는 어린 학생들도 많다. 정선아리랑제는 이렇게 사랑 받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을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매년 가을 펼쳐지는 특별한 행사다.

올해에는 9월29일(금)부터 10월2일(월)까지 나흘간 공설운동장과 아라리촌 일원에서 열린다. 정선아리랑제위원회가 주최하는 행사는 칠현제례, 정선아리랑공연, 정선아리랑 월드뮤직, 정선아리랑창극 등 지정문화재 관련행사 13종목, 팔도아리랑 공연 등 초청공연 11종목, 농악, 전통혼례 등 민속행사 13종목, 정선아리랑총체극 등 경축행사 10종목, 그네뛰기, 널뛰기 등 민속경연행사 11종목 등 6개 부문 73종목이 다채롭게 펼쳐질 예정이다.


총 6개 부문 73 종목이 다채롭게 펼쳐질 예정

▲ 지난해 펼쳐졌던 아리랑제의 전야제 행사.

이중에서 눈길을 끄는 행사는 한민족 대표 아리랑인 정선·진도·밀양·경기아리랑을 한 자리서 감상할 수 있는 팔도아리랑 공연이다. 또 정선아리랑의 세계화를 위해 매년 10여 개국이 참가하는 월드뮤직페스티벌 등 다채로운 행사로 꾸미는데, 올해에는 국내외 14개팀 정도가 참가할 예정이다. 지난해에는 우리 전통의 세계화와는 일부분 동떨어졌다는 지적을 받은 터라 주최측에서는 세계의 민속 소리꾼들을 초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지난해부터 체육행사를 최대한 줄이는 대신 주민과 관광객들이 어울려 즐길 수 있는 장승깎기대회, 허수아비만들기대회, 정선아리랑경창대회, 정선사투리대회, 문학축전, 아리랑난타, 아리랑춤사위 공연 등을 마련했다.

▲ 총체극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정선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또 지난해에는 축제기간 중에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많은 행사가 엉망이 됐다. 전시물을 야외에 전시하지도 못했고, 운동장이 질퍽해져 장화를 신고 공연을 관람하거나 주행사장인 공설운동장과 보조행사가 열린 정선아라리공원을 연결한 섶다리가 폭우로 떠내려가기도 했다. 축제관계자는 “날씨는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으나, 그래도 관람객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서 준비 중”이라 했다.

축제 행사장을 돌아다니다가 정선 장터를 둘러보지 않으면 참 서운하다. 작은 시골장터인 정선5일장(2·7일)은 오지 마을 사람들이 깊은 산속에서 직접 채취한 나물이나 약초 따위를 들고 나와 파는 곳이다. 또 이곳은 산골 사람들이 오랜만에 친지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도시에서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이런 정경들에서 옛 추억을 되살리는 즐거움이 된다. 축제기간 중에는 마지막 날인 10월2일만 정식 장날이 된다. 아쉽게도 월요일이다. 그러나 관광객이 몰리는 축제 기간 중에는 물건을 들고 장에 나오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을 어렵지 않게 구입할 수 있다.

산골 처녀의 사랑 이야기 들릴 듯

▲ 정선 지역 경제의 효자로 떠오른 레일바이크.

골지천과 송천이 몸을 섞는 아우라지는 남한강 천리 물길 따라 뗏목을 운반하던 뗏사공들의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 강 건너 산기슭에선 ‘아우라지 처녀’ 동상이 강물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이지 /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정선아라리 중에서 대표적인 이 가사에 얽힌 사연은 일제 시대인 191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랑하는 사이였던 여량리의 처녀와 구절리 너머 유천리에 사는 총각이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느 날 싸리골로 동백을 따러 가기로 했다. 그런데 전날 밤에 내린 폭우로 강물이 불어 나룻배가 건널 수 없게 되었다.

두 연인은 애타는 연정을 품은 채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고. 위의 가사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날 수 없는 안타까운 여인의 마음을 아라리에 실어 읊은 것. 또 당시 이 강의 뱃사공이면서 장구도 잘 치던 지장구 아저씨가 이들의 사연을 눈치 채고, 대신 두 사람의 심정을 아리랑에 담아낸 것이라고도 한다.

▲ 상정바위에서 바라본 한반도 지형.

강폭은 10m도 안 되는 짧은 거리. 뱃사공은 줄을 천천히 당기며 이곳이 정선아리랑 ‘애정편’ 가사의 발상지임을 구수한 사투리로 풀어낸다. 배 운항시간은 09:00~18:00. 매주 월요일은 뱃사공이 쉬는 날이다. 편도 500원.

아우라지역에서 송천을 따라 8km쯤 거슬러 올라가면 구절리～아우라지 구간(7.2㎞)을 달리는 레일바이크의 출발지인 구절리역이다. 걷기 위험한 철길을 레일바이크로 달리면 마치 기관차 운전사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운동도 될 뿐만 아니라 산골을 달리는 맛이 아주 일품이다.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40~50분 소요. 요금 2인승 15,000원, 4인승 20,000원. 인기 있는 상품이라 현지에서 표를 구입하기 어려우므로 예약하는 게 좋다(www.ktx21.com, 1544-7786).

▲ 화전민들이 살던 투막집을 재현하는 행사.(왼쪽) 총체극 행사의 아름다운 무용(오른쪽)

정선아리랑에도 등장하는 화암약수

▲ 광산지역에서 발견된 화암동굴. 화암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정선의 자랑으로서 흔히 ‘화암8경’이라 불리는 화암약수, 거북바위, 용마소, 화암동굴, 화표주, 소금강, 몰운대, 광대곡이 줄줄이 길손을 기다리고 있으니 축제 여행은 더욱 다채로워진다. 정선 읍내에서 59번 국도를 타고 태백 방면으로 가다 424번 지방도로 갈아타면서 20km 정도 달려가면 화암동굴이 반긴다. 동양 최대의 황금빛 종유벽을 비롯해 석회동굴 광장, 화려한 석순, 석주 등을 간직한 석회동굴이다.

이 동굴 주변은 원래 천포광산이 1922년부터 1945년까지 금을 캐던 금광이었다. 관람구간은 총 1,803m로서 ‘금맥 따라 365’, ‘천연동굴광장’ 등 모두 5개의 테마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관람하는 데는 총 2시간 정도 걸린다(요금 어른 4,000원, 어린이 2,000원. 주차료 2,000원. 당일에 한하여 동굴 주차권으로 화암약수 무료 주차 가능. 화암동굴 관리사무소 전화 033-560-2578).

화암8경 중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화암약수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옆 바위에서 솟아난다. 철 성분이 많은 탄산약수인데, 주민들은 위장병, 눈병, 피부병 등에 효과가 있다고 자랑한다. 정선아리랑에서도 화암약수의 물맛을 노래하는 가사가 있을 정도로 정선 사람들에겐 빼놓을 수 없는 물로 꼽힌다. 약수터 산택길에 설치한 스피커에선 이곳이 정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듯 정선아리랑 노랫소리가 계속 흘러나온다(입장료 어른 1,500원, 어린이 700원. 주차료 2,000원. 화암약수 관리사무소 전화 033-560-2576).

화암약수에서 나와 421번 지방도를 타고 소금강으로 방향을 잡으면 두 개의 돌기둥이 우뚝 솟아오른 화표주를 지난다. 여기서부터 몰운대까지의 4~5km에 이르는 계곡은 흔히 ‘정선 소금강’이라 불리는 절경지. 몰운대 주차장에서 오솔길을 따라 250m 정도 걸으면 너럭바위가 있는 정상이다. 굽어 자란 노송 너머로 보이는 소금강 계곡의 풍광이 제법 아름답다.

▲ 정선 레일바이크 시발점인 구절리역에 설치한 '여치의 꿈' 카페(왼쪽) 토종 민물고기인 어름치 모양의 '어름치'카페도 눈길을 끈다.(오른쪽)

# 숙박

읍내에 대림장(033-563-7555), 동호모텔(033-562-9000), 정선장(563-0066) 등이 있고, 여량 아우라지에 옥산장(033-562-0739), 구절리에 고향민박(033-562-5005), 구절민박(033-563-7985) 등이 있다. 화암약수 바로 앞에 있는 화암장(033-562-2374)에 묵으면 이른 아침 약수터 주변 산책하기가 수월하다. 화암약수 야영장은 1일 소형 4,000원, 중형 5,000원, 대형 6,000원.


# 별미

정선 읍내에는 곤드레나물밥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많다. 상에 올라오는 나물은 당연히 인근의 가리왕산 등지의 높고 깊은 산속에서 채취해온 것들이다. 곤드레는 흉년이 들었을 때 먹던 구황식물로 정식 명칭은 고려엉겅퀴. 밥솥에 들기름을 약간 붓고 곤드레나물을 깐 다음 참깨가루를 적당히 뿌리고 쌀을 얹어서 밥으로 만든다. 다른 나물에 비해 쌀과 잘 어울리고, 나물향이 담백한 게 장점이다. 시장 안에 정선회관(033-562-0073) 등 전문 식당이 많다. 콧등치기국수, 메밀국수, 메밀전 등을 맛볼 수 있는 식당도 여럿 있다.


# 교통

서울→정선 동서울터미널(02-446-8000)에서 매일 14회(07:10~18:55) 운행. 3시간50분 소요, 요금 15,600원.
춘천→정선 터미널(033-241-0285)에서 매일 2회(08:25, 14:00) 운행. 4시간 소요, 요금 15,200원.
원주→정선 터미널(033-746-5223)에서 매일 6회(06:40~17:44) 운행. 3시간 소요, 요금 10,100원.
강릉→정선 터미널(033-643-6092)에서 매일 12회(07:00~19:00) 운행. 3시간30분 소요, 요금 7,900원.
제천→정선 터미널(043-644-5533)에서 매일 6회(07:55~18:50) 운행. 2시간 소요, 요금 6,600원.
열차편 청량리역에서 태백선 열차를 타고 증산에서 하차해 정선행 열차(14:00, 18:15)나 버스를 이용한다. 태백선 열차시각 08:00(무), 08:25(새), 10:00(무), 12:00(무), 14:00(무), 17:00(새), 22:00(무), 23:00(무). 요금 무궁화 12,500원, 새마을 18,600원. 열차고객안내 전화 1544-7788. 증산에서 정선까지는 매일 7회(08:05. 10:35, 12:00, 13:05, 14:30. 16:30, 18:20) 운행하는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40분 소요.
자가운전 △영동고속도로 진부 나들목→59번 국도→나전리 삼거리(우회전)→42번 국도→정선 △영동고속도로 새말 나들목→42번 국도→안흥→평창→미탄→광하→정선 <3시간30분 내외 소요>
*정선군청(www.jeongseon.go.kr) 문화관광과 033-560-2561
*정선아리랑제위원회(www.arirangfestival.org) 033-563-2646
*정선 시외버스터미널 033-563-9265
*정선역 033-563-7788

사진제공 = 정선군청

“산이 워낙 크고 깊어 숨은 듯 조용히 살기엔 참 좋죠.”
가리왕산(加里旺山·1,561m)은 산줄기가 첩첩으로 펼쳐진 강원도에서도 덩치가 결코 만만치 않은 산으로 손꼽힌다. 아주 오랜 옛날 동해쪽에 자리 잡고 있던 맥국(貊國)의 갈왕(葛王 또는 加里王)이 예국(濊國)의 공격을 피해와 이곳에 성을 쌓고 머물렀다고 하여 갈왕산이라고 불리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가리왕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산 북쪽 골짜기의 장전리에는 ‘대궐터’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는 갈왕이 대궐을 삼았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나이든 주민들은 이 산을 갈왕산이라 부르고 있다.

▲ 잔돌제단과 고사목돌탑이 돋보이는 가리왕산 정상.

얼음물처럼 차가운 어은골 계류

대도시에서의 30여 년 생활을 정리하고 수년 전 이곳 정선으로 들어와 가리왕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장순원(36)씨는 이 전설을 굳게 믿는 듯했다. 그리고 과거에 만났던 어떤 산보다 가리왕산이 좋다고 했다.

아침 10시, 가리왕산 휴양림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어은골은 휴양림 시설이 있는 아래쪽을 제외하고는 원시의 기운이 철철 넘쳤다. 계곡 주변으로는 수액 채취로 알려진 고로쇠나무를 비롯해 물푸레나무, 엄나무, 가래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그 나무들 사이로는 굵은 다래 덩굴이 척척 걸쳐 있었다.

“와, 완전히 얼음물이네!”
산행을 한 8월 초순은 30℃가 넘는 날의 연속이라 산행에 제법 겁이 났으나 산행 내내 그다지 큰 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어은골의 냉기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어은골의 어원을 한자로 풀어 ‘계곡의 이무기 바위를 보고 고기가 숨은 데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너덜지대 특유의 한기가 퍼져 나오는 것으로 봐서 어쩌면 ‘얼음골’에서 유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양림 매표소 뒤쪽엔 한여름에도 긴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냉기가 뿜어나오는 거대한 얼음동굴이 있는데, 동굴 안쪽에는 삼복더위에도 얼음이 차있어 예전엔 주민들이 냉장고로 대신 썼다고 한다. 어쩌면 이 가리왕산 너덜지대 전체가 한 겨울에 얼음을 잔뜩 품고 있다가 여름이 되면 서서히 녹기 시작하면서 냉장고 역할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 장구목이 삼거리에서 중봉 가는 길에 만난 야생화들.

우리나라 유일의 산삼봉표석 있는 산

이 계곡길은 임도를 만나기 직전까지 1시간 넘게 산길을 따라 이어졌다. 계곡이 끝나고 임도 근처서부터 산길은 제법 가팔라졌다. 산길 주변의 숲은 점점 옅어지면서 말나리꽃, 동자꽃 같은 야생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곰취도 보였다. 사실 가리왕산은 산나물과 약초 천국이다. 곰취는 물론이요, 참나물, 산작약, 당귀, 산마늘, 더덕, 그리고 산삼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특히 가리왕산 산삼은 유명하다.

가리왕산은 예전부터 산삼의 주산지로 알려져 왔는데, 얼마 전 조선시대에 세운 산삼봉표석(山蔘封標石·도유형문화재 제113호)이 정선과 평창의 경계 지점인 마항치(말목치) 고개 정상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삼 주산지를 보호하기 위해 일반인의 채삼은 물론 출입을 금지시키려고 설치한 봉표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것이라 한다.

봉표에는 1723년(경종 3)을 뜻하는 옹정 정미년이라는 기록이 있고, 강릉과 정선의 경계 지점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 시기에 진부 지역이 강릉부에 속해 있었다는 점이 봉표의 건립 시기를 추정하는 자료가 된다.

“저도 산삼을 캤답니다.”
놀랍게도 장씨는 가리왕산에서 산삼 세 뿌리를 캔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 오래 묵지 않아 다 합쳐 몇 십만 원 정도밖에 못 받았지만, 그래도 장씨에게는 제법 뿌듯한 경험이었다. 어쨌든 가리왕산은 도시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짧은 연륜의 약초꾼에게도 산삼을 내줄 정도로 개체수가 많은 것은 확실한 듯했다.

▲ 어은골을 찾은 피서객들. 한여름에도 얼음같이 차가워 인기가 있다.(왼쪽) 가리왕산자연휴양림 매표소 뒤쪽에 있는 얼음동굴. 삼복더위에도 금방 한기가 느껴진다.(오른쪽)

능선 주변 산기슭엔 온통 멧돼지 흔적이

가리왕산 주능선이 가까워지고 해발 1,200m 지점을 넘어서자 나무의 키가 작아지고 산길도 부드럽고 완만해지기 시작했다. 야생화도 많아졌다. 말나리, 모시대, 두메고들빼기, 마타리 , 둥근이질풀….

“이게 뭘까?”
갑자기 시야에 땅을 파헤친 흔적이 들어왔다. 멧돼지 짓이었다. 처음에는 한두 평 정도로 작았으나 오르면 오를수록 그 면적은 수십 평, 수백 평으로 넓어졌다. 급기야는 눈에 들어오는 수천 평의 면적이 모두 파헤쳐 있었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도 땅을 파고 있었던 듯 흙은 채 마르지 않았고, 발자국도 너무도 선명했다.

처음에 호기심으로 둘러보던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장씨는 동네 사람들에게 “멧돼지 400마리가 떼를 지어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장씨가 뱀을 쫓기 위해 든 나뭇가지는 어느새 멧돼지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로 바뀌어져 있었다. 하지만 산행 중 만약 멧돼지를 만나면 조용히 나무 뒤로 숨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큰 탈이 없다고 한다.

돌제단과 돌탑이 있는 정상

고사목 몇 그루 서있는 펑퍼짐한 정상은 시야가 탁 트여 참으로 정상다웠다. 널찍한 헬기장 한쪽으로는 막돌 제단과 고사목에 돌을 올려 한반도 모양을 만들어 놓은 돌탑이 어울린 풍경은 보기 좋았다. 돌제단 그늘에서 감자 몇 개와 주먹밥으로 요기하며 주변 조망을 실컷 즐겼다. 정상에 올라온 등산인들은 대부분 올라온 길로 되짚어서 휴양림쪽으로 내려갔으나 우리는 중봉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산길은 완만하고 주변에는 야생화가 가득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가을이면 이 산길에 흔한 야생화는 물론이요, 투구꽃, 그늘돌쩌귀, 촛대승마, 자주꽃방망이 등 귀한 꽃들도 여기저기 피어날 것이다. 여전히 멧돼지의 흔적이 생생했으나 겁도 사라졌다. 능선 일대에는 주목과 구상나무 등이 꿋꿋하게 서 있었다.

▲ 휴양림의 산책로에서 만난 돌탑.

장구목이 삼거리를 지나고 중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완만하고 평탄했다. 야생화가 지천이고, 아름드리 주목도 자주 발길을 멈추게 했다. 이 중에서 최고의 야생화 포인트는 장구목이 삼거리와 중봉 사이의 펑퍼짐한 안부였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보아온 온갖 야생화가 한 자리에 가득했다. 주변으로 첩첩으로 펼쳐진 산줄기를 바라보는 맛도 일품이었다.

돌탑 2기가 서있는 중봉은 단독 봉우리라기보다는 펑퍼짐한 능선인 듯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중봉 갈림길에서 세곡 임도 이정표를 따라 매표소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길은 완만했으나 제법 지루한 기분도 들었다.

중봉서 30여 분만에 세곡 임도를 만났다. 임도를 가로질러 산길로 접어들었다. 제법 가팔랐다. 인적이 드문 듯 산길은 점점 좁아지고 거칠어졌다. 마을이 가까워졌을 때 산길은 잡풀로 뒤덮여 아주 희미해졌다. 문득 강원도 특유의 잔돌밭이 나타났고, 그 너머로 휴양림 아랫마을이 아름다운 풍경화처럼 한적하게 펼쳐졌다. 정말로 어디선가 정선아리랑 가락이 들려올 것만 같았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산행길잡이

가리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모두 4가닥이지만 접근과 숙박이 용이한 자연휴양림을 기점으로 삼는 게 가장 무난하다. 심마니교~어은골~임도~절터~정상 코스는 5km에 2시간30분 소요, 매표소~중봉 남릉~임도~중봉~정상 코스는 7km에 3시간30분이 소요된다. 이들은 모두 휴양림 지구에서 올라가는 코스다.

이외에도 가리왕산 동북쪽에서 오르는 숙암분교~오장동~임도~중봉~정상 코스는 8.6km에 3시간30분 소요, 북쪽의 장구목이~임도~장구목이 삼거리~정상 코스는 6km에 2시간30분이 소요된다.

일반적인 산행코스는 산막지구 뒤편의 심마니교에서 어은골을 통해 정상에 오른 다음 온 길을 되짚어 다시 휴양림으로 내려서는 코스다. 총 4시간~4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심마니교~어은골~임도~정상~장구목이 삼거리~중봉~임도~매표소 회귀코스는 전체적으로 중식 시간까지 합쳐 7시간 소요.

가리왕산은 전체적으로 험난한 구간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산길이 거친 편이라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산행에 적합지 않다. 식수는 심마니교에서 50분 거리에 있는 합수지점에서 구하면 된다.


# 숙박
가리왕산 자연휴양림

휴양림에는 산림휴양관 1동 14실, 단독 숲속의 집 10동 등의 숙박시설과 텐트 80동을 수용할 수 있는 야영장을 갖추고 있다. 단독 숲속의 집 8평형(4동) 44,000원, 10평형(2동) 55,000원. 15평형(4동) 80,000원, 산림문화휴양관 9평형(8실) 55,000원, 12평형(3실)과 14평형(3실) 67,000원, 오토캠프장(20개) 8,000원, 야영데크(19개) 4,000원. 입장료 어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 3,000원. 숙박시설은 인터넷(www.huyang.go.kr)을 통해 예약을 받는다. 전화 033-562-5833.

수정헌

가리왕산 휴양림 매표소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는 민박집 수정헌(守靜軒)은 옛 대성탄좌 직원 합숙소를 개조해서 만든 민박집이다. 노자의 채근담 32조에 나오는 수정(守靜)이라는 단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름을 정했다는 이 집 주인 내외는 강원도 정선이 좋아 3년 전 내려가 정선을 고향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들이다.

총 650평의 너른 언덕 위 대지에 벚나무, 단풍나무 등 아름드리 나무로 둘러싸여 있고, 마당에서는 평화로운 산골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루 숙박료는 2인 기준 20,000원이며 1인 추가시 5,000원 추가. 솜씨 좋은 안주인이 준비해주는 식사는 백반이 1인 5,000원, 엄나무와 황기 등을 넣고 요리한 토종닭백숙은 25,000원 선이다. 전화 033-563-8860, www.sujunghun.com.


# 교통

정선→회동(가리왕산 자연휴양림)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매일 8회(06:20, 07:20, 09:10, 11:10, 13:30, 16:20, 18:00, 20:00) 운행하는 군내버스 이용. 30분 소요, 요금 1,030원.
자가운전 정선→42번 국도(평창 방면)→6km→휴양림 입구 삼거리(우회전)→424번 지방도→6km→휴양림 <정선 읍내서 20여 분 소요>
*정선 군내버스 전화 033-563-1094

글·사진 민병준 르포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