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기자의 촉촉한 시선] ‘열혈남아’의 비애

엊그제 인사동에서 인터뷰 때문에 만난 ‘열혈남아’의 설경구는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어요? (차)승재 형은 도대체 뭐 한거야”라며 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사랑 따윈 필요 없어’의 포스터 속에서 문근영도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던가.
다음 주 목요일(9일), 한국 영화사(史)에 유례없는 일 하나가 벌어진다. 한 영화사에서 만든 두 편의 영화가 동시 개봉하는 것. 싸이더스FNH(대표 차승재·김미희)가 만든 ‘열혈남아’와 ‘사랑 따윈 필요 없어’가 비련의 주인공이다. 서로 다른 제작사가 만든 영화라도 대형 스타가 나오는 ‘주력작’들은 제작자들이 사전에 의견을 조율해 같은 날 개봉을 피하는 게 이 바닥 ‘예의’다. 충무로 한 제작사 대표는 “할리우드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해괴한 일”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 영화사에서 만든 영화지만, 배급사가 다른 것이 첫 번째 이유. 즉 한 공장의 제품이지만, 유통업자가 다르다는 얘기다. ‘사랑 따윈 필요 없어’의 배급사는 쇼박스, ‘열혈남아’의 배급사는 CJ엔터테인먼트 관계사인 시네마서비스다. 업계 1, 2위의 배급사들이 한두 주씩만 서로 개봉 일정을 양보해 주면 될 것을 너무 야박하게 굴었다는 것이다. CJ는 연간 40편, 쇼박스는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틀고 있다. 1, 2주에 한 편꼴로 개봉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상황이 이러니, 배급사에서는 ‘형제끼리 맞짱 뜨게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지도, 피할 수도 없었다는 얘기.
제작사인 싸이더스가 ‘너무 많이 만든 죄’가 있다고 우스개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싸이더스는 이 두 편을 합쳐 올해에만 11편을 개봉한 한국 최대의 영화사. 하지만 600만 관객을 넘긴 ‘타짜’로 숨을 돌리기까지, 올해 싸이더스의 타율은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한 관계자는 “요즘 싸이더스는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이라며 “품질관리보다 제작편수 늘리기에만 신경 쓴 탓”이라고 모진 소리를 했다.
한 제작사에서 만든 영화가 어쩌다 같은 날 개봉할 수도 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 영화 산업의 ‘불균형’이다. 한국은 배급사와 제작사가 별도로 발전해 왔다. 급격한 산업화가 시작된 2000년대 이후, 영화산업의 권력은 싸이더스 같은 제작사(생산자)에서 CJ나 쇼박스 같은 배급사(유통사)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당연히 제작사의 수익률은 지속해서 떨어졌고, 결국 기여도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제작사들은 ‘배급’ 겸업을 선언했다. 싸이더스도 그런 길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먼저 출발한 MK픽쳐스, 프라임엔터테인먼트가 고전 중인 데다, 연간 500억원의 종자돈은 필요하다는 배급업 시작을 앞두고 멈칫거리다 이런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앞으로 수많은 제작사들이 ‘덩치’를 키우려 달려가다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다.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리건 간에, 부디 싸이더스가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 꿈의 공장을 경쾌하게 돌려 주길. 사실 안정적인 시스템을 바탕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찍는 내공이야말로 대부분이 인정해 온 제작사 싸이더스의 미덕이었으니까. 또 그래야 ‘열혈남아’도 더운 피를 가라앉히고, 관객도 극장 문을 나서며 만족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