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왜 명품을 벗어야 했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최고 패션잡지 편집장 미란다의 비서가 된 앤드리아의 좌충우돌을 다룬 영화입니다. 앤드리아는 미란다 뒤치다꺼리에만 신경을 쓰느라 남자친구 네이트와 갈등을 빚지요. 사실 여기엔 인생관의 충돌이 있습니다. 패션계 거물인 미란다로 대표되는 빠르고 화려한 삶과 보조 요리사가 직업인 네이트로 대변되는 느리고 소박한 삶 사이에서 앤드리아가 갈등하는 셈이니까요.
말미에 이르러, 자신을 비난하는 앤드리아에게 미란다가 말합니다. “우린 닮았어.” 이어 앤드리아가 “난 이런 삶을 원치 않았어요”라고 부인하자 “아니, 넌 원했어. 모두 우리처럼 살기 원해”라고 못박지요.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앤드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란다를 떠나갑니다. 그리고 원래 자신이 속했던 평범하지만 진실된 세계로 돌아가지요.
그런데 어쩐 일일까요. 교과서에서 옮겨 적은 것 같은 결말 메시지에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조차 그 직전까지 보아온 휘황한 세상이 훨씬 더 생생하게 떠오르는 역설이라니요. 네이트에게 돌아가 사랑을 회복하는 장면보다 미란다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앤드리아가 갖가지 샤넬 의상을 갈아입으며 눈부시게 변신하는 장면에 훨씬 더 끌리는 마음은 뭐란 말입니까. 배우의 매력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 관객이 몰리는 것은 갑자기 헛기침을 하고 뒷짐진 채 말씀하시는 종반 메시지 덕분이 아닙니다. 수많은 명품으로 가득 찬 별천지 세계를 엿보게 만드는 초-중반 볼거리 때문이지요.
장르 영화에서 결말은 사족이거나 빈말 혹은 습관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위선인 경우도 있지요. 관음증을 자극하는 베드신으로 승부를 걸다가 느닷없이 정신적 사랑을 예찬하며 끝맺는 에로 영화, 잔혹한 총질과 칼질로 관객 마음 속 눈먼 폭력성을 맘껏 발산하게 해놓고 극이 끝나가면 시침 뚝 뗀 채 폭력의 해악을 거론하는 액션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요.
어느 정도 로맨틱 코미디적인 성격이 있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역시 장르 관습을 무시할 순 없었겠지요. 전개 과정이 어떠했든, 로맨틱 코미디는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정계 실력자 가문의 멋진 청년보다 불화로 7년째 별거 중인 시골의 남편을 선택(‘스위트 알라바마’)하고, 열렬히 구애하는 할리우드 톱스타 대신 평범하고 왜소한 남자친구에게 달려가는(‘내 생애 최고의 데이트’) 장르니까요.

그런데 왜 허다한 장르 영화는 귀담아 듣는 사람이 거의 없는 말, 사실 별로 내키지도 않았던 말, 그래도 그냥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말을 결말에서 되풀이하는 걸까요. 대중이 가장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 장르영화 관습을 만든다는 걸 감안하면, 많은 경우 그것은 핑계 같은 게 아닐까요.
상영 시간 내내 명망가의 돈과 명예, 할리우드 스타의 외모와 명성, 패션계의 화려함에 빠져들어 대리충족을 하다가도, 빤한 월급과 뻔한 일상이 기다리는 삶으로 복귀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허둥지둥 욕망을 부정해야 할 구실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아무리 버둥대도 입이 닿지 않았던 포도를 포기하며 “그 포도는 신포도”라고 애써 자위하는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말이지요. 어쩌면 로맨틱 코미디의 따스한 결말은 판타지에서 리얼리티로 돌아가는 지점에 놓인 차디찬 문턱이나 계단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