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과 관객 ‘입술’로 통하다

자정이 가까운데도 눈빛만은 초롱초롱하다. 8일 밤 11시를 넘긴 압구정동 스폰지하우스. 80석 규모의 작은 극장에 30여 명의 관객이 오붓하게 앉아 시선을 집중한다. 스크린 앞 자그마한 무대에서 긴장한 듯 물을 한 모금 들이켜는 사람은 이재용 감독. 자신의 두 번째 작품이었던 ‘순애보’(2000)가 지금 막 이 자리에서 상영됐다. “음~음~, 벌써 6년이 지난 영화고, 나도 안본 지 오래돼서 기억이 희미한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제가 가장 즐거워하며 만들었던 영화…”. 약간 당황한 듯 더듬는 목소리가 오히려 친근하다. 관객과 감독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 ‘관객과의 대화’다.
부산이나 전주 등 큰 영화제에서나 볼 수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가 요즘 작은 극장을 중심으로 잇따라 열리고 있다. 사실 1000만 관객을 넘는 영화가 한 해에 두 편씩 등장하고, 최고급 시설을 갖춘 멀티플렉스가 전국 곳곳에 자리잡은 요즘이지만, 역설적으로 관객은 ‘문화’로서의 영화에 대해 어떤 갈증을 느껴왔다. 한국의 영화산업이 점점 더 규모와 속도에만 관심을 두면서, 시사회나 개봉관 무대인사를 제외하면 관객들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온 것. 최근 불고 있는 ‘관객과의 대화’는 그런 산업적 흐름에 대한 문화적 반발인 셈이다.

대규모 마케팅에 의한 작위적 행사가 아니라, 서로 자발적 만남이란 점에서 ‘관객과의 대화’가 가지는 의미는 소박하지만 남다르다. 이날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대학생 이창용씨는 “감독님을 보기 위해 오늘을 기다렸다”고 살짝 들떠 있었고, 고3 시절 ‘순애보’를 처음 봤다는 직장인 한지희씨는 “DVD로만 보다가 6년 만에 극장에서 만나게 되니 마치 죽었던 애인을 다시 만난 느낌”이라며 들떴다. “마지막 비행기 장면에서 감독님도 출연하신 것 같다”는 질문에는 “연기를 한 건 아니고, 엑스트라로 잠깐…”이라며 겸연쩍어했다. 30분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관객들은 끊임없이 손을 들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고, 감독은 때로는 당황하며, 때로는 미소를 띠며 답변을 이어나갔다. 원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의 이재용 감독도 “홍보나 선전과 상관없이 관객들과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갑다”면서 즐거워했다.
‘관객과의 대화’는 작가주의 영화나 작은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광화문 씨네큐브, 낙원상가의 필름포럼, 명동의 CQN, 종로와 압구정동의 스폰지하우스를 중심으로 활발하다.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은 지난여름 수시로 이들 극장을 찾았고, ‘천하장사 마돈나’의 이해영·이해준 감독도 지난 10월 CQN에서 관객들과 마주앉았다. ‘세계’ 개봉에 맞춰 지난달 방한했던 중국의 지아장커 감독은 필름포럼에서 행사를 가진 뒤 관객의 열정에 감동, 예정에 없던 사인회와 기념촬영을 갖기도 했다. 이날 이재용 감독과 관객들의 만남은 최근 2주일 동안 스폰지하우스에서 열린 ‘한국 멜로영화 특별전’의 일환. 정지우(사랑니) 송해성(파이란) 이현승(시월애) 이윤기(아주 특별한 손님) 김대승(가을로) 감독이 거의 하루 간격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사람냄새를 그리워하는 아날로그 관객들이라면, 이들 극장의 홈페이지를 자주 살필 일이다. 오늘(10일) 밤 8시 50분에는 종로 시네코아에서 배창호 감독이 신작 ‘길’로 관객들을 만나고(좌석 매진), 오는 21일에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 ‘방문자’의 신동일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찾아준 관객들을 만날 예정이다. 8일 자정 무렵 스폰지하우스에서는 감독과 관객들이 함께 극장 문을 나섰다. 11월의 압구정동은 예상보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