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약사라는 괜찮은 직업에 성격도 둥글둥글하고 인물도 점잖게 생긴 남자. 그리고 비록 '짝퉁'을 팔긴 하지만 나름대로 동대문 패션상가에서 점포를 운영 중인 미모의 여자. 연애를 해도 그럭저럭 '그림'이 나올 법한 커플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 모두 자유롭게 사랑의 감정을 만끽하기에는 너무도 커다란 짐을 안고 있다. 남자에게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형이 있다. 아마도 노모가 돌아가시면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 여자는 더 심각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5억원의 빚을 평생 갚아야만 한다. 5억. 사랑의 힘만으로 남자가 함께 지고 가기에는 너무나 큰 멍에다.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감독 변승욱, 제작 오브젝트필름)은 바로 이같은 운명을 지닌 두 남녀의 사랑을 그리는 멜로 영화다. 멜로는 멜로인데, 기존의 그것들에서 보여졌던 것처럼 아름답거나 처절한 사랑을 보여주진 않는다. 변승욱 감독은 "일반 멜로와의 차이점을 두기 위해 감성을 줄이고, 살아가는 정서를 채워넣었다"고 밝혔다. 굳이 변 감독의 말이 아니더라도 영화에서는 '사랑' 보다는 '정'이, '정' 보다는 '삶의 무게'가 느껴진다. 동네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인구(한석규)는 장애를 앓고 있는 형 때문에 결혼은 언제나 뒷전이다. 그런 인구의 곁에 새로 이사온 혜란(김지수)이 나타난다. 이 여자 역시 아버지의 빚 때문에 연애는 고사하고 성격마저 까칠해졌다. 옛 여자친구의 결혼소식에 마음이 착잡한 인구와 빚 때문에 동생의 결혼을 말리고 괴로워 하던 혜란은 함께 술을 마신 후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다.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커질수록 현실의 짐도 커져만 간다. 무거운 소재이니만큼 두 시간이 자칫 힘겨워질 법 하다. 그러나 배우들의 호연은 관객들을 편안하게 스크린으로 빨아들인다. 특히 정신질환자 역을 맡은 이한위는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영화에 웃음과 눈물을 주며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다소 희화화된 감이 없진 않지만, 그의 어눌한 행동은 한석규가 느끼는 사랑의 감정과 삶의 무게감 등을 극대화시켰다.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등 멜로영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석규 역시 '천생 멜로배우'라는 느낌을 줄 정도로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반면, 김지수는 잇따라 멜로 장르에만 출연해서 그런지 큰 무리는 없었지만, '연기가 정형화돼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자아냈다. 결혼을 앞둔 남녀나 지금 자신들의 연애가 힘들다고 생각되는 커플, 가족이 '굴레'처럼 여겨지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봄직한 영화다. 다만, 제목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소프트한 로맨틱 코미디 정도를 생각한다면 절대 오산! 팝콘과 함께 즐기는 재미보다는 담배 한 개피, 술 한 잔이 생각나는 인생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스포츠조선 김천홍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