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려 점찍어둔 영화, 간판 내렸다고?DVD가 있잖아요!

박찬욱 감독이 아직 ‘영화광’ 신분에 머물러 있던 청년 시절, 그는 자신의 비디오룸에 ‘시체안치소’라는 난폭한 이름을 붙였다. 문화적 갈증을 채워주는 공을 세웠지만, 화면에는 비가 내리고, 군데군데 잘려나간 VHS 테이프 때문에 붙여준 이름이었다. 물론 선명한 디지털 화질의 DVD가 보급되면서 이 ‘시체 안치소’라는 이름은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 추세대로라면 한국은 다시 ‘시체안치소’ 시절로 돌아갈 지도 모르겠다. 올해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20세기 폭스 등 할리우드 직배사가 한국에서의 사업을 접은 사례가 말해주듯, DVD시장이 부진 수준을 넘어 거의 붕괴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표). 2002년 3630억원 수준이던 한국 홈 비디오(DVD·VHS)시장 규모는 2006년 1350억원으로 곤두박질했다. 출시작도 급감했다. DVD칼럼니스트 박진홍씨는 “극장 흥행작이 아니면 DVD 출시 자체가 힘든 상황”이라면서 “지난해만 해도 월 70편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월 30~40편 출시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반면 미국은 같은 기간 20조원에서 27조 8000억원으로 홈 비디오 시장이 커졌다.

극장매출과 홈 비디오 매출을 비교하면, 두 나라 국민의 관람성향은 더욱 또렷하게 대별된다. 한국은 극장 수익이 홈 비디오 수익의 9배 수준인데, 미국은 반대로 홈 비디오 수익이 3배가 더 많았다. 일봄도 홈 비디오 시장이 극장 시장의 두 배가 넘는다.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상의 불법 다운로드 때문. 한국 DVD업계에서는 올 한 해만 불법 다운로드로 무려 640억원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DVD 애호가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DVD를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영화를 영화로 대접하고 보관하는 유일한 매체가 DVD이며, 불법 다운로드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화질과 음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한 달에 평균 10여개의 타이틀을 구매하는 30대 회사원 유정민씨는 “내가 보고 싶은 1920, 30년대 영화를 제대로 되살려준 매체는 DVD밖에 없다”면서 “비록 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의 복원에 후원자가 된 듯 뿌듯함까지 느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