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기자의 촉촉한 시선] 김기덕의 복귀 선언

해가 막 고개를 숙인 18일 오후 서울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앞.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숨’의 촬영 현장 공개 자리다. ‘숨’까지 14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김 감독이 이런 자리를 가진 건 처음이다.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에. “앞으로 한국에서는 영화를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던 5개월 전의 충격적 발언을, 그는 이날 주워담았다. 장황하게 여러 설명을 덧붙였지만, 요약하면 자신의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의 소중함과 의미를 깨닫게 됐다는 것. 자포자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래서 수많은 고민 끝에 ‘숨’을 국내에서 개봉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김 감독의 발언에 대한 약간의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당시 영화 ‘시간’ 개봉을 앞두고 “20만 명을 동원하지 못하면 앞으로 내 작품을 국내에서 개봉하지 않겠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또 영화 ‘괴물’에 대한 발언(“한국영화와 관객의 수준이 최정점에서 만난 영화”)이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자, “내 영화는 쓰레기…한국 영화계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자학(自虐)적이고 위악(爲惡)적이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김기덕감독이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중인 영화 [숨] 촬영현장을 언론에 공개했다. 김감독이 제작보고회에서 자신의 영화에대해 이야기하고있다./ 조선일보 전기병기자

‘시간’은 국내 8개 극장에서 개봉해 3만여 명의 관객을 모았다. 김 감독은 “제게 애정이 있는 여러분들의 충고와 격려를 들으며, 이 3만 명은 20만 명 못지않은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또 ‘1000만 관객 시대’라는 수식어를 예로 들면서 “997만 명의 반토막 애정보다, 3만 명의 온덩어리 애정이 저에게는 훨씬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고도 했다. “내가 수없이 그런 것도 아니고, 이랬다 저랬다 딱 한 번 했지 않느냐…”라고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

작년과 올해 김기덕 감독을 지켜보면서 ‘순간의 진정성’이란 표현이 떠올랐다. 2006년 8월의 김기덕이나 2007년의 김기덕이 서로 다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발언을 했을 뿐이다. 또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의 나이도 이제 40대 후반. 더구나 그는 어떤 의미에서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주류 감독이다. 한 해에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두 군데의 감독상(2004년 베를린, 베니스)을 휩쓸었고, 지금까지 미국에서 개봉된 한국영화 중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그의 작품(‘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240만 달러)이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는 유일한 한국 감독이다. 그것도 한국 상업영화 평균제작비 51억원(2006년 영진위 통계)의 시절에, 단 한 번도 10억을 넘기지 않은 제작비(대만스타 장첸과 하정우 박지아가 주연한 이번 영화‘숨’은 심지어 2억5000만원이다)로. 저예산 영화의 열악한 현실에 대한 그의 발언에 거의 대부분 공감하면서도, 이제 분노를 에너지로 삼을 나이는 지났다고 보는 이유다.

한국의 영화관객은 그의 영화를 볼 권리가 있고, 김기덕 감독은 한국의 영화관객에게 그의 영화를 보여줄 의무가 있다. 김기덕 감독의 복귀를 진심으로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