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범, 너를 현상수배한다”

1991년 이형호군 유괴사건을 재연(再演)한 ‘그 놈 목소리’(2월 1일 개봉)는 단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한 가지 목적을 향해 전력 질주한다. 아이를 빼앗긴 부모(설경구와 김남주)의 절박한 심리묘사와 얼굴 없는 ‘그 놈’(강동원)의 현상수배. 그러니, 이 영화의 대의명분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공소시효를 넘기도록 15년 이상 검거하지 못한 인면수심의 유괴범을 잡자는 주장에 누가 동의하지 않을 것인가.

박진표(41) 감독에게 궁금했던 것은 사실 그 다음이었다. 60억 가까운 돈을 들인 상업영화가 ‘현상수배극’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며 사회적 공분(公憤)에 집중하는 까닭엔, 이슈를 만들겠다는 상업적 이유가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차라리 적은 제작비로 만든 ‘작은 영화’였다면 좀 더 진심을 인정 받았을텐데.

느릿한 목소리로 여유를 잃지 않던 감독의 어투가 갑자기 빨라진 것도 이 대목이었다. “이런 질문 나올 줄 알았어요. 제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아프군요. 물론 즐길 수는 없고, 피할 수도 없으니, 받아들여야겠지만”이란 요지의 긴 문장을, 그는 쉬지 않고 토해냈다.

1991년 이형호군 사건 바탕 실화 장르? 범인 잡기 위한 특수목적극
많은 사람 ‘선동’하려고 상업영화 택해
엄마役 김남주, 범인役 강동원 호연· 설경구? 연기 논하는 것이 오히려 욕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특수목적극’이란 표현을 썼다. 5억 남짓한 돈으로 만들어서 적은 숫자의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이런 상업적 마케팅 논란도 없었겠지만, 그 방식은 자신의 근본 의도와 맞지 않았다는 것. 많은 돈을 들여, 마케팅 열심히 해서, 많은 사람에게 보게 만들기. ‘특수목적’은 결국 보다 많은 관객의 정의감을 ‘선동’해서 숨어있는 범인을 잡아내는 것이다. 박 감독은 “더 센 방법이 있다면 더한 짓이라도 했을 것”이라면서 “사용하는 의미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선동’이라면, 기쁘게 그 표현에 동의하겠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사건재연극’ 혹은 ‘시사고발극’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영화는, 충무로는 물론 세계 영화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종류의 작품이다. 유괴범의 목소리를 예고편에 공개하고, 현상수배 광고전단을 골목에 붙일 때부터 심상치 않았지만, 영화는 정말 노골적으로 “그 놈을 잡자”고 공개 선언한다. 보수적 관객이라면 이게 과연 영화일까라는 의문을 가질 법도 하다. 그는 “영화의 정의에 대한 정답이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나 자신에게도 실험이지만,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실험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엄마 역의 김남주와 목소리로만 출연하는 ‘그놈’ 역의 강동원 역시 성실한 연기를 보여줬지만, 엔딩 4분 정도의 시간 동안 울먹이며 호소하는 설경구의 연기는 이 영화의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빛나는 대목이다. 박 감독은 “연기를 잘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그에게 욕이 될 것 같다. 설경구라는 사람은 뭐라 따로 해 줄 말이 없다”는 말로 무한한 신뢰를 표했다.

▲ 영화 '그놈' 박진표 감독 인터뷰/조선일보 허영한기자

커피 잔이 바닥을 드러냈을 무렵, 농담 섞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노인의 성(‘죽어도 좋아’·2002)과 AIDS 환자의 사랑(‘너는 내 운명’·2005) 등 실화만을 고집하는 그의 작품 스타일이, 상상력 부족을 감추려는 알리바이 아니냐고. 그는 “맞다. 내가 상상력이 풍부했다면 이런 작품을 했겠느냐”고 껄껄 웃으면서, “하지만 상상력이 유치한 영화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느냐”고 힘있게 되받았다. 10년 넘는 지상파 방송 다큐 PD의 경력을 바탕으로 충무로에 뛰어들어 사회적 편견을 고발하고 대중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있는 이 사내는, 사실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문제제기와 여론형성을 계속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에게는 ‘감독 저널리즘’이란 수식어가 더 어울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