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의 비극에 주목한다”

칸, 베니스와 더불어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로 꼽히는 57회 베를린 국제영화제가 오는 8일 개막한다. 8일부터 18일까지 총 373편의 영화가 상영될 이번 영화제에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경쟁부문에 진출한 것을 비롯,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 이송희일 감독의 ‘후회하지 않아’, 이윤기 감독의 ‘아주 특별한 손님’, 이해영·이해준 감독의 ‘천하장사 마돈나’ 등 많은 한국 영화들이 여러 비경쟁 부문에 고루 선정되었다.

자크 리베트, 이리 멘젤, 프레드릭 와이즈먼, 마이클 스노우 등 유럽과 미주에서 활동하는 극영화,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각 부문의 거장들도 신작을 들고 베를린을 찾는다. 또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잘 알려진 미국감독 아서 펜에게 평생공로상에 해당하는 명예황금곰상이 주어질 예정이며, 전후 최고의 독일감독으로 꼽히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15시간이 넘는 거작(巨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디지털 복원판이 세계 최초로 공개된다.

영화제 집행위원장 디이터 코슬릭은 올해 베를린 상영작 가운데는 2차대전이 초래한 비극과 공포를 다룬 작품들과 동시대 세계화의 영향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는데, 경쟁부문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코슬릭의 말이 결코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선한 독일인’, 로버트 드니로의 ‘굿 셰퍼드’, 스테판 루조비츠키의 ‘화폐위조자’ 등이 2차대전 (직후)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 비경쟁으로 초청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걸작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대 세계화의 영향이라고 하는 이슈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은 중국 감독들인 것 같다.

경쟁부문에 진출한 두 편의 중국 영화 중 하나인 리유의 ‘로스트 인 베이징’은 도박과 성에 대한 묘사가 검열당국의 심기를 건드려 일부 장면에 대한 삭제를 강요당했고 15분이나 되는 분량이 잘려나간 뒤에야 간신히 해외영화제 상영허락을 얻어낼 수 있었다. 작년에는 ‘여름궁전’이라는 작품으로 칸영화제에 참가했던 로우예 감독이 중국 검열당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 5년간 제작금지처분을 받은 사례가 있다.

‘망종’으로 잘 알려진 재중동포 장률 감독의 신작 ‘히야쯔가르’(한국-프랑스 합작)에는 중국과 몽고 국경지대에서 살아가는 탈북자 여성이 등장한다.

유럽과 미국의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올해 베를린 경쟁 라인업에서 아시아 영화는 한국영화와 중국영화에만 한정되어 있다. 중국영화들과 더불어 박찬욱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가 경쟁부문에 포함된 데는 어딘지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선택이 아시아 영화에 대한 베를린 영화제의 이중적이고 분열된 시선을 무심결에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다룬 영화이거나 혹은 낯선 쾌락을 선사하는 ‘반칙’의 영화이거나. 물론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다. 정확한 판단은 각각의 영화가 모두 공개된 다음에나 가능할 것이며, 그동안 20편의 경쟁작은 금곰상을 놓고 서로 다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