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벗고 ‘인간’을 입다

평소 코미디 영화에 불신을 갖던 관객도 유난히 너그러워지는 시간이 돌아왔다. 설 명절이다. 코미디 흥행불패의 대목을 노리고 임창정·하지원 콤비의 ‘1번가의 기적’(15일 개봉), 차태현·이소연의 ‘복면달호’(15일 개봉), 신현준·최성국·권오중의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8일 개봉)이 달린다. 올해 설 코미디의 공통점 하나, ‘조폭’과 ‘가문’과 ‘사부’가 모두 사라졌다. 둘, 육두문자도 마구잡이 구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관대해진 관객 우려먹기’라는 비판은 모두 넘어선 수준이지만, 대신 이 세 편의 코미디에는 어떤 강박도 엿보인다. 이 세 편이 거둔 성취와 아쉬움. 설 코미디 3인 3색.

1번가의 기적 - 눈물과 웃음 50대 50… 세 편 중 가장 염도 높아

세 편 중 염도(鹽度)가 가장 높다. 눈물과 웃음의 비율이 거의 50:50에 가까운 이 휴먼 코미디는 철거를 코앞에 둔 판자촌 달동네의 해프닝을 그렸다. 이 동네에 사는 여자 권투선수 명란(하지원)과 철거를 위해 투입된 깡패 필제(임창정)를 중심축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중반 이후 슬그머니 무게 중심을 옮긴다. 스크린에는 병든 넝마주이 할아버지를 가장으로 하는 조손(祖孫)가정, 다단계판매를 네트워크 비즈니스로 자기최면하며 신분상승을 꿈꾸는 처녀, 컨테이너 가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삶의 비상(飛翔)을 꿈꾸는 판자촌 어린아이들의 욕망이 있다.

웃음은 슬랩스틱이나 대사보다 상황에서 비롯된다. 에쿠스를 타면서도 기름값은 한 번에 1만원을 넘지 않는 철거 깡패의 영세함, 보호자를 찾는 사무적 질문에 애처로운 눈빛으로 예수님 사진을 쳐다보는 판자촌 소년들의 시선, 수돗물도 나오지 않는 달동네에 인터넷 전용선을 깔려는 사기의 술수에서 폭소는 시작된다. 무리한 강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웃음들이다. 하지만 이 웃음과 눈물의 정신 없는 횡단 사이에서 약간의 부담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개별 장면들은 더할 나위 없이 희극적이고, 또 비극적이지만 그 연결이 매끄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기획 코미디조차도 “정치적 올바름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강박감이 상업적으로 성공했던 연출자의 무의식에 깔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낭만자객’에서 ‘조폭’과 ‘섹스’라는 키워드로 흥행했던 윤제균 감독의 4년 만의 복귀작.

김관장 vs 김관장 vs 김관장 - 너무 단조롭고 착하지만 무협지의 쾌감

설정으로 보면 세 편 중 가장 무협지적인 매력을 갖고 있다. 시골 중국집 무림각의 어여쁜 딸(오승현)을 차지하기 위한 김 관장 세 명의 음모와 쟁투. 태껸 도장 김관장(신현준)과 검도 도장 김관장(최성국), 쿵후 도장 김관장(권오중)의 대결이다. 우리가 익히 확인했던 코미디 배우 두 명이 자신의 캐릭터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웃음을 유발한다. 홀아비로 등장하는 ‘태껸 현준’은 ‘맨발의 기봉이’에서 보여줬던 무장해제된 캐릭터를 다시 선보이고, ‘검도 성국’은 예의 치졸한 행동과 느끼한 눈빛을 광선총처럼 발사하며 우리 무의식에 숨어있는 스스로의 또 다른 얼굴을 자극한다. 예의와 실력을 고루 갖춘 미남 총각 ‘쿵후 오중’만이 이들과 대립하면서 갈등 구조를 만들어낸다.

전반부는 코미디, 후반부는 액션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이 영화는 명절 코미디와 가장 어울리는 조합으로 보인다. 이음매도 전반적으로 매끄럽다. 하지만 그런 성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너무 착하거나 단조롭다. 욕설과 눈물을 거의 찾을 수 없는 이 코미디 영화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에피소드와 동어반복의 유머로 참신했던 초반 도입부를 갉아먹는다. 저속한 언어와 인위적 감동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 ‘개그 콘서트’나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단편적 웃음은 넘어섰어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아쉬움이다.

복면달호 - 차태현 ‘뽕필’ 유감없이… 촌스럽지만 날것의 매력

세 편 중 기술적인 만듦새는 가장 뒤처진다. 웰메이드라는 단어가 ‘칭찬’이 아니라 ‘기본’이 되어버린 2007년의 충무로에서 ‘복면 달호’의 일부 장면은 허술하다 못해 관객이 다 안타까울 지경. 극단적인 예 하나. 3류 트로트 가수 차서연(이소연)의 빗속 야외 공연에서, 스크린 속 햇빛은 분명히 강렬한데 빗줄기는 주룩주룩이다. 해님이 만들어낸 그림자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들. 하지만 기술적인 아쉬움과 별도로 차태현이 부르는 트로트 ‘2차선 거리’는 작지 않은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소위 뽕짝과 3류 인생의 효율적 비유, 그리고 루저(looser)의 성장드라마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다.

영화는 멜로와 코미디의 결합이다. 지방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는 신분이지만, ‘락커’도 아니고 ‘라아~커’로 자신을 소개할 만큼 자의식 과잉이던 봉달호(차태현)가 복면을 쓴 트로트 가수로 대성공을 거둔다는 만화적 설정. 서연과 달호의 로맨스는 신파에 가깝지만, 이 영화의 서사적 축인 트로트의 인생역전과 묘하게 어울리는 구석이 있다. 차태현의 개인기는 이미 관객에게도 친숙해진 재능이지만, ‘복면 달호’에서 그는 ‘뽕필’(뽕짝 feel)이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자신의 최대치를 뛰어넘는다. 분명 촌스럽지만, 날것의 매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