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한 발의 총성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바벨’(22일 개봉)은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이달 말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 등 6개 부문의 강력한 후보로 올랐다거나,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수퍼스타의 이름에 홀려 이 영화를 선택하려는 관객이라면, 한 번 더 고민할 것을 권한다.

멕시코 출신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빚어낸 이 슬픈 지구의 초상(肖像)은 “영화라는 매체는 예술을 필요로 한다”(그러니까 아예 예술이 아니라는 뜻이다)고 비아냥댔던 브레히트의 지난 세기 지적을 무안하게 만든다. 4개 대륙 6개 언어(수화 포함)로 쌓아 올린 이 거대한 이미지의 바벨탑은 태초의 하나됨을 스스로 내팽개친 뒤 혼란과 단절 속에 발버둥치는 현대인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스스로의 덫에 걸려들어 소통불가 상황에 처한 인간의 나약함을 여러 번 곱씹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모든 것은 엽총 한 자루에서 비롯되었다. 아프리카 서북단 모로코 여행을 떠난 미국인 수잔(케이트 블란쳇)의 어깨를 의문의 총알 한 발이 꿰뚫고 지나간다. 관광버스 안, 남편 리처드(브래드 피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당한 횡액이다. 황량한 유목지의 언덕 위에선 열 살 남짓의 목동(牧童) 두 녀석이 한참 티격태격이다. “내가 더 정확하게 쏠 수 있다”고. 전날 염소를 방목하는 형제의 아버지는 500디람(모로코 화폐)과 염소 한 마리로 친구가 가지고 있던 사냥용 엽총 한 자루를 맞바꿨다. 그 엽총은 모로코까지 사냥 원정을 왔던 일본인 야스지로(야쿠쇼 코지)가 현지의 가이드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고. 결국 리처드 부부는 제 날짜에 귀국하지 못하게 되고, 부부의 어린 남매를 돌보던 LA의 멕시코인 보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허락없이 월경(越境)한다. 돌봐줄 이 없는 미국인 남매를 옆에 끼고서.

영화는 4개 대륙을 빠른 속도로 횡단하고 종단한다. 모로코의 유목지, 일본 동경의 마천루, LA의 평온한 주택가, 그리고 멕시코의 자유분방한 결혼식 현장이다. 전작 ‘아모레스 페레스’와 ‘21그램’을 봤던 관객이라면 이냐리투 특유의 이미지 연금술을 확인했겠지만, 그는 자유분방하게 분할한 시간과 이미지 조각으로 관객에게 퍼즐 게임을 제안한다. 단순히 소박한 영화적 기예(技藝)로 보이던 이 초반부의 조각들은, 아랍인에 대한 미국인의 근거 불량한 공포·국경을 사이에 둔 멕시코인과 미국인의 적대적 대립·청각장애를 지닌 일본 여고생의 소통에 대한 근원적 욕망을 순서대로 짚어가면서 전 지구적 모자이크를 완성한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생면부지라고 믿고 살아가던 현대인들이 사실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다는 역설. 그리고 우연으로 격발한 사소한 해프닝 하나 때문에 그 거미줄이 뻥 뚫려 버릴 수 있다는 비극적 진실을.

‘바벨’은 주지하다시피 창세기에 등장하는 혼란과 단절의 상징. 그 경계를 넘어설 때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금단의 문(門)이기도 하다. 같은 남미 문화권의 위대한 선배 보르헤스가 ‘바벨의 도서관’에서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그 문을 두드렸다면, 이냐리투는 거인의 어깨를 발판으로 이미지와 사운드의 연금술로 무장한 뒤 그 문 너머를 들여다 보고있다. 분명 고통스런 체험이지만, 진실이 그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