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취화선’과 쌍벽 이루는 임권택 감독의 걸작

KBS2

밤 11시35분

거장 임권택 감독이 장대한 두 편의 시대극 ‘개벽’과 ‘태백산맥’ 사이에 만든 ‘서편제’는 1993년 당시 단성사 단관 개봉으로 서울에서만도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영화 흥행기록을 경신했던 화제작으로 기억된다. ‘장군의 아들’ 시리즈의 성공 및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태백산맥’ 작업의 중단으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소품이지만, 훗날의 ‘취화선’과 더불어 한국적 예술가 영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소설가 이청준의 ‘남도사람’ 연작 중 ‘서편제’와 ‘소리의 빛’을 원작으로 했다.

영화는 오래 전에 헤어진 소리꾼 누이 송화를 찾아 남도 곳곳을 헤매고 다니는 동호라는 인물의 시점을 축으로 전개된다. 모질고 아픈 시대를 견뎌내며 득음(得音)의 예술적 경지를 갈구했던 떠돌이 소리꾼들의 사무치게 슬픈 이야기가 임권택 특유의 플래시백(과거회상) 속에서 유장한 리듬으로 펼쳐진다. 소리꾼들의 소리를 닮은 예스러우면서도 질박한 어투의 대사들과 질고한 한(恨)의 정서로 풍경을 물들이는 방식은 동시대 한국 영화계의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갓 데뷔한 신인이었던 오정해는 덜 삭은 연기에도 불구하고 송화라는 인물에 꼭 들어맞는 외모와 판소리 솜씨로 주목을 끌었으며 이후 ‘태백산맥’과 ‘축제’에서도 임권택 감독과 함께 작업한 바 있다.

임권택 감독은 “득음의 세계에 들어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자 ‘서편제’와 ‘소리의 빛’의 후일담 격인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만은 자신이 다룰 수 없었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최근 촬영이 끝난 ‘천년학’은 바로 그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다. 100번째 작품을 통해 득음의 세계로의 일보를 내디딘 거장의 현재를 신실한 설렘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라도 ‘서편제’는 꼭 다시 보아야 할 작품이다. 113분 ★★★★☆ (5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