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LG배 세계기왕전] 운명의 순간

〈제12보〉(167~195)=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다. 소리 없이 간질이듯 어깨 위로 내려앉는 봄비. 하지만 그렇게 한 시간만 거닐어 보라. 전신이 흠뻑 젖어온다. 이 바둑의 진행 상황이 딱 그런 흐름. 상의가 빗물에 흥건히 젖었건만 흑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못 깨닫고 있다.

167로 참고 1도 1은 6까지 산다. 168로 대마 생환. 그래도 조한승은 여전히 우산을 접은 채, 가랑비 속을 흥얼거리며 걷는다. △ 두 점을 잡고 169(역끝내기 9집)로 틀어막아 충분하다는 표정이다. 172는 177을 선수한 뒤 둘 점. 하지만 175의 역끝내기가 패착이 됐다. 거꾸로 172는 ‘수순 착오의 승착’으로 둔갑했다. 운명이었을까.

175로는 참고 2도 1 이하 7까지가 최선. 이것이면 미세하나마 흑승이었다. 188자리에 백돌이 놓여선 마침내 역전이다. 속기(速棋)로 일관하던 흑의 손이 멈췄다. 그런 자세로 30여 분…. 아차 싶어 비로소 우산을 폈지만 이미 전신이 흠뻑 빗물에 젖은 뒤였다. 해설자 박정상이 힘없는 손길로 타자를 친다. “재역전시킬 곳이…잘 안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