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LG배 세계기왕전] 두더지의 脫出

〈제4보〉(43~57)=대마의 사활에 집착하는 사람은 하수(下手)다. 고수들은 돌 몇 점을 초개처럼 버리고 대세를 챙긴다. 공격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대마를 잡을 수 있더라도 무조건 투자하지는 않는다. 흔히 말하는 사소취대(捨小取大). 말은 쉬워도 매 순간 깊은 계산을 거쳐 정확한 판단을 내리려면 최상급의 기예가 요구된다.

43을 선수한 뒤 즉각 45로 움직였다. 우리에 가뒀던 두더지의 탈출이다. 그냥 놓아준다면 물론 백이 망한 결과. 그러나 막상 쉽게 잡을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50까지는 일단 외길이며 51로 붙여왔을 때 52가 문제의 한 수였다. 56 시점에서 흑은 하변에 한 수만 보강하면 산 모습이다. 손을 뺄 경우엔 백 ‘가’, 흑 ‘나’, 백 ‘다’로 패(覇).

그냥 살 수 있는 곳에서 패(覇) 맛을 남긴 이유는 무엇인가. 57이 백의 외곽 단점을 보는 급소이자 대세점이기 때문이다. 패란 ‘절반의 삶’인 동시에 ‘절반의 죽음’을 뜻한다. 참고도를 보자. 백 52로는 1, 3으로 흑을 살려주고 5의 대세점을 차지하는 쪽이 실전과 비교해 훨씬 더 좋았다. 57을 맞으면서 백은 때 이른 고행 길에 접어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