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들 초고속 약진… ‘타이틀 독점’ 끝났다

‘꿩 잡는 게 매’라고 했다. 프로기사들의 실질적인 서열은 보유 ‘타이틀’의 개수에서 결정된다. 돈도, 명예도 타이틀이란 이름의 사냥감을 통해 공급되기 때문이다. 정상급 기사들의 ‘각축 성적표’인 타이틀 판도가 최근 몇 달 사이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다. 빠른 세대교체 속에 예측을 벗어난 결과가 속출하며 새로운 타이틀 분포 지도(地圖)가 자리잡기 시작한 것.

우선 눈길이 가는 것은 현역 타이틀 홀더 분포가 다변화를 이뤘다는 점이다. 1년 전 이맘때만 해도 5명에 불과하던 타이틀 보유 기사 수가 올해 3월 하순 현재 8명으로 대폭 늘었다. 1인 독식 현상이 줄어들고 정상권의 저변이 두꺼워졌다는 방증이다. 이 때문에 타이틀을 따면 이듬해 1년 동안 거의 모든 국제대회 출전 시드를 받던 과거 관행도 사라지게 됐다.

안조영(십단) 조한승(천원) 윤준상(국수) 등 지난 후반기 이후 등장한 타이틀 홀더들은 모조리 정규 기전서 처음 우승을 맛본 ‘새내기’들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십단과 국수가 이창호의 ‘영토’였음을 감안할 때 새로운 도전세력은 변화의 당당한 주역으로 한몫씩 했다. 1년 전 제한 기전 포함 4관왕과 2관왕을 누리던 박영훈, 최철한의 지분율이 대폭 준 것도 이들과 무관치 않다.

타이틀전 무대의 ‘최대 주주’ 교체도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작년 이 무렵 국제 기전 포함 6관왕으로 군림하던 이창호는 국수 십단 바둑왕 춘란배를 내주고 1년 만에 2관왕으로 내려앉았다. 반면 작년 3월 국제 기전 2개와 제한 기전(맥심배) 1개뿐이던 이세돌은 지난 해 하반기 이후 물가정보배 GS칼텍스배 바둑왕 등을 잇달아 정복, 순식간에 5관왕으로 올라섰다.

과거 타이틀전 역사는 이창호의 독점사(史)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94년엔 물경 13관왕을 달렸고, 95년 및 96년 획득한 타이틀 수 역시 각각 13개에 달했다. 21년간 131개나 되는 타이틀을 독식하다시피 했던 그가 국내 ‘최대 주주’로 처음 올라선 것은 91년 6월. 박카스배 제패로 마침내 조훈현과의 타이틀 보유 수를 6대5로 역전시키며 이창호 독주시대를 열었었다.

그로부터 15년8개월인 금년 2월, 십단전 우승자가 안조영으로 교체된 순간 지분율 1위 자리는 이세돌에게로 넘어갔다. 이창호가 보유 타이틀 수 2위로 밀려난 것이다. 이창호의 아성이 막을 내렸는지, 다시 재역전을 이룰는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다변화와 최다 보유자 교체 등, 타이틀을 둘러싼 변화의 중심에 이창호가 있다는 점이다.

향후 타이틀 판도와 관련해선 아직 본무대에 상륙하지 못한 신예 유망주들의 움직임도 꼼꼼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허영호(신인왕전) 백홍석(신예10걸전) 등 신예 기전 챔피언들, 그리고 이영구 강동윤 김지석 등 급성장 중인 유망주들은 정상권 진입이 머지않았다는 평.

전반적인 상향 평준화 흐름 속에 이창호의 실지(失地)회복, 선두 주자로 올라선 이세돌의 ‘보폭’과 함께 이들 ‘제3세력’의 약진 여부가 새로운 타이틀 지도의 3대 변수로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