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들에게도 천적은 있다

바둑계는 바야흐로 춘추전국시대. 최정상을 다투는 고수들 간에도 먹이 사슬은 존재한다. 물고 물리는 혼전 속에 새로 발표된 4월 기사 랭킹에서도 상당수 순위 변화가 이뤄졌다. 이들 ‘최우등생’들끼리는 서로 간에 어떤 전적을 갖고 있을까. 새로운 ‘베스트 12’를 기준으로 상대 전적을 뽑아본 결과 흥미로운 현상들이 확인됐다<표 참조>.

3개월째 1위를 지키고 있는 이세돌이 가장 무서워하는 기사는 2위 이창호도, 3위 최철한도 아닌 7위 안조영과 11위 이영구였다. 특히 이영구와는 단 2국을 두었을 뿐이지만 아직 ‘판 맛’을 보지 못한 상태. 하지만 안조영의 경우 다른 상위 랭커들에겐 맥을 못추었고, 이영구는 이창호를 만나선 단 1승도 따내지 못했다.

‘톱12’간 상호 전적 토털 1위는 단연 이창호다. 총 117승 59패로 66.5%에 달하는 승률. 3판을 두면 두 판은 이긴 셈이다. 게다가 최철한을 뺀 나머지 10명을 모조리 승률에서 압도하고 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이창호의 전성 시절 작성된 것이란 게 문제. 조한승 안조영 목진석 등 과거 데리고 놀던(?) 상대들에게 가장 최근 판에서 지고 있음이 주목을 끈다. 바둑계에선 지나간 10패보다 막 따낸 1승에 훨씬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올 들어 9할 대의 무시무시한 승률로 12위까지 치고 올라온 목진석은 박영훈에게 유난히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성진에겐 목진석과 조한승이 천적. 9위에 랭크된 원성진은 그러나 3위 최철한, 4위 박영훈 등 이른바 ‘송아지 라이벌’들과 상대해선 랭킹과 관계없이 절반의 승률을 지켜내고 있다. 바둑이 기세와 심리의 승부임을 말해주는 자료다.

정상권 기사들의 ‘먹이사슬’은 박정상 윤준상 고근태의 3각 관계(?)에서 절정을 이룬다. 국수 등극으로 지난달 11위에서 일약 8위로 점프한 윤준상은 전 천원 고근태에게 3연승을 거두었고, 고근태는 현역 세계 챔프 박정상에게 3연승을 기록 중이다. 하지만 박정상은 윤준상만 만나면 펄펄 날아 5승 1패로 압도적 우세를 보이고 있다.

상위 랭커 12명 간의 상호 전적 합계에서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기사는 이창호 이세돌 박영훈 윤준상 등 4명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12명 중 ‘최고령’인 이창호에게 오랫동안 승수와 승률이 편중, 상대적으로 대국 수가 적은 기사들의 승률이 낮게 나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들 최정상권 강호들의 상호 대결 기회는 앞으로 갈수록 늘어날 전망. 그리고 그 치열한 패권 다툼의 와중에서 랭킹은 재편되고 새로운 먹이사슬도 자리 잡게 될 것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