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옮긴 김승옥의 ‘무진기행’

제약회사 회장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기준(신성일)은 4년 만에 고향 무진으로 향한다. 회사와 얽힌 문제로 도피 삼아 찾은 고향이지만 여기서 그는 권태로운 도시의 삶에서 잠깐 벗어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안개로 유명한 고향 무진은 편안한 안식처라기보다는 한때 병역 기피자로 숨어 지냈던 그의 음울한 과거를 들쑤시는 달갑잖은 장소이다. 오랜만에 만난 고향의 친구들 역시 속취(俗臭) 가득하기는 여느 도시인들과 다를 바 없고, 서울생활을 동경하는 인숙(윤정희)이라는 이름의 시골 음악선생만이 기준에게 잠깐의 위안이 되어줄 뿐이다. 그가 인숙과 헛된 연정을 키우고 있을 무렵 아내에게서 그의 승진 소식을 알리는 급전이 날아오고 기준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향 무진을 떠난다.

해방 이후 한국문학에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평가받았던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 ‘무진기행’을 김수용 감독이 영화화한 작품이다(이 영화의 성공 이후 김승옥은 직접 연출에 뛰어들어 김동인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감자’를 만들기도 했지만 불행히도 결과는 좋지 않았다). 몇몇 평자들에 의해 1960년대 한국 영화의 걸작으로까지 평가받기도 한 작품이지만 원작과 달리 멜로드라마적 감상(感傷)이 짙은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는 이 영화에 그런 평가를 내리는 건 다소 과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 작품은 김수용의 연출자로서의 장점과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특히 인숙이 기준 앞에서 주제가 ‘안개’를 부르는 당혹스러운 장면은 김수용이 원작의 독특한 감수성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과거와 현재를 잇대고 교차시키는 방식에서는 당대 서구영화계를 풍미했던 모더니즘적 스타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1967년 80분 ★★★☆ (5개 만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