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00편만에 처음 해보는 사랑이야기”

“그나마 저 놈 덕분에 제가 여기서 숨을 좀 쉽니다.”

임권택(71) 감독이 영화사 사무실 창문 아래로 가리킨 곳은 학동 공원이었다. 벤치 열 개 남짓한 작은 공원이지만, 회색으로 포위된 강남 오피스텔 거리에서 신록(新綠)을 뿜어내는 몇 안 되는 공간. 어쩌면 그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지금의 한국 영화에게 가지는 의미가 그렇지 않을까. 젊은 관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숨막히게 달려온 충무로에게, ‘천년학’은 주변을 음미하며 한 걸음씩 내딛는 산책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 주는 작품이다. 감각과 재기(才氣)가 넘쳐 오히려 질식할 것 같은 충무로에서, 이 노장의 넉넉한 허파 덕분에 가쁜 숨을 돌린다.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늘 그렇듯, 어눌한 목소리에 겸손과 솔직함이 묻어났다.

―내일(12일)이 개봉입니다. 마침내 100번째 영화를 선보이는 소감은요.

“이제 정말 짐을 좀 던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중간에 제작 중단사태가 있었잖아요. 그때 투자사들이 발을 뺀 이유가 연기자에게 스타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뭐가 난감했냐면, 그나마 전에 흥행을 좀 했던 영화들이 신인만 기용했던 작품들이었거든요. ‘서편제’나 ‘장군의 아들’이 다 그랬죠. 곤혹스럽더라고요. 또 하나는 시비(市費), 군비(郡費) 받아서 2005년부터 지어놓은 세트가 있었어요. 광양의 초가며 장흥의 주막이며… 영화를 못 만들었다면, 그렇게 실없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제 순조롭게 개봉을 하게 되니 그때 생각이 납니다.”

―공교롭게도 14년 전 ‘서편제’(93년 4월 10일 개봉)와 비슷한 시기의 개봉이네요.

“민망한 이야기지만, 5월에 하자는 걸 내가 앞당기자고 고집했어요. 원래 4월은 사람들이 극장을 잘 찾지 않는 시기인 걸 알고 있어요. 그런데 내가 감독한 영화는 유난히 4월에 흥행한 작품이 많았거든요. ‘서편제’도 그렇고요.”

―’서편제’가 예술가 영화였다면 ‘천년학’은 멜로에 가깝습니다. 왜 하필 사랑이었나요.

“내가 100편 찍는 동안 사랑 이야기는 해 본 적이 없어요(웃음). 이제 결혼해서 애들도 크고 하니 사랑 이야기를 해볼 만 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고 달콤한 러브 스토리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고요. 멀리 두고서 늘 찾아 헤매고, 마음으로 사랑을 떠나 보내는 이야기죠. ‘한 폭의 한국화’라고 봐주시면 좋겠네요.”

―요즘의 젊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느린 화법이 통할지 궁금합니다.

“’서편제’때도 경험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젊은 세대들이 영화에 빨려드는 걸 봤어요. 지금도 물론 세대 간의 격절이 있지만, 우리는 같은 민족적 정서, 같은 민족적 인자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기대지만, 그렇게 믿고 있어요. 실제로 젊은 관객들 대상으로 시사회를 해 보면 좋아해요.”

―지금까지 만든 100편 중 이번에 가장 많은 필름을 쓰셨는데도 8만2000자였다면서요. 20만자 넘게 쓰는 게 보통인 요즘 젊은 감독들이 ‘좌절’했다고 들었습니다(웃음).

“몸에 밴 가난했던 습관이 체질화된 것이죠. 60년대에 찍을 때는 5만 자 넘어가면 난리가 났어요. (조금 망설이다가) 요즘 젊은 세대들이 좀 함부로 필름을 많이 쓰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합니다만, 따로 얘기해 본 적은 없습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게, 그네들은 풍족한 세월을 산 세대잖아요. 우리처럼 열악한 시대를 산 사람들은 잘 이해도 안 가겠죠.”

―후배들에게 충고도 좀 하고, 가르침도 좀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 안 하는 편입니다. 같은 또래들이 얘기하는 것도 신경 쓰일텐데, 나잇살 먹어서 현장에 대해 간섭하는 것처럼 꼴불견이 없어요. 젊은 창의성을 방해할 이유도 없고요.”

― ‘거장’이라는 호칭이나 표현은 솔직히 어떠신가요.

“(너털웃음을 지으며)칠 노릇이오. 사람들이 생각 없이 ‘거장’ 어떻고 이런 말을 내 이름 앞에 붙인 게 좀 되는데, 처음부터 부담스러웠어요. 남들은 나를 보면 이제 앞뒤도 훤히 알고, 잘 대비하는 사람으로 봐주는 모양인데,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고, 매번 턱걸이만 하고 있어요. 99번째 영화든, 100번째 영화든 거기서 거기지, 100번째 영화라고 갑자기 달라지겠습니까. ‘거장’이라는데, 그런 경륜이 쌓인 영화를 어떻게 만드는 건지 알 수도 없고요(웃음). 그러면서 속으로 그랬죠. 나이 먹은 만큼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게 결국 내 100번째 영화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거죠.”

―이제 그 부담에서 벗어나셨으니 101번째 영화도 찍으셔야죠.

“지금 소원은 그겁니다. 내가 101번째로 무슨 영화를 할지는 몰라도, 또 한 편을 찍을 수 있다면 모든 부담을 훨훨 털고, 자유롭게 찍고 싶다는 생각에 꽉 차 있어요. 모르겠어요. 시작하면 또 무슨 멍에를 지고 갈지. 하지만 지금 소원은 그겁니다.”

―분위기를 조금 바꿔보죠. 지난번 후배들이 준비한 헌정행사에서 답사를 하면서, 부인(채령)의 존재를 “로또 맞은 행운”으로 표현하며 고마워하셨죠.

“우리 사모님께서요(웃음), 다른 사람들은 상 받을 때 다들 아내한테 고마움을 표현하는데, 당신은 한 번도 그런 얘기를 안 한다며 면박을 주는 거요. 주변 사람들도 ‘그러다 집에 가서 무사하겠냐’며 걱정을 대신 해주고. 그래서 한 번 해 본 것이오.”

―이 말씀 집에서 들으면 무사하시겠어요?(웃음)

“아, 그럼 이 말도 써주시오. 영화감독이라는 게 그리 큰 돈 버는 일도 아닌데, 우리 사모님은 내가 집안 문제로 단 한 번도 걱정하게 한 적이 없어요. 온전히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요. 그러니까 내가 ‘로또 맞았다’고 얘기한 게, 맞는 말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