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 걸린 고성현 혼신의 연기로 감동 줘…

힘을 준 곳에서 사고가 생기고,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환호가 터진다. ‘예측 불가능성’이야말로 모든 공연 예술의 매력이자 함정이다. 1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막 내린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가 이런 경우였다.

타이틀 역 리골레토를 맡은 바리톤 고성현은 첫 날(12일) 감기로 공연 초반에 바리톤 최진학에게 무대를 넘겨야 했다. 서울시합창단 단원인 최진학이 ‘깜짝 출연’으로 오히려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마지막 날인 15일에도 고성현의 컨디션은 완벽하다고 볼 수 없었다. “나는 혀로 사람을 죽이고, 자객은 칼로 죽인다”며 광대 노릇을 하는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는 1막 2장의 독백에서 조금은 힘에 부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중간 휴식이 끝난 뒤, 그의 모습은 분명 달라져 있었다. 공작이 농락한 여인이 자신의 딸임을 깨닫고 분노하는 2막 아리아 ‘대신들이여’부터, 3막 피날레까지 처절한 절규를 내뱉었다. 때로는 컨디션보다 혼신을 다하는 연기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는 걸 고성현은 몸으로 보여줬다.

딸을 잃는 아버지(리골레토),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던지는 딸(질다), 숱한 여인을 농락하는 악당(만토바 공작). 세 배역은 작품의 세 꼭짓점을 이루며 탄탄한 갈등 구조를 빚어낸다.

질다 역의 소프라노 강혜정은 자연스럽고 청초한 목소리 결을 그대로 살렸다. 고음 처리에 다소 불안한 대목이 없지 않았지만, 화장기 없는 미성(美聲)으로 객석의 환호를 이끌었다. 막이 열릴 때마다 고음 아리아가 복병처럼 쏟아지는 만토바 공작 역의 테너 이재욱도 가볍고 낭랑한 톤으로 무리 없이 배역을 소화했다.

첼로를 중심으로 한 서울시향의 현악군(群)과 말끔한 목관 라인은 최근 국내에서 공연됐던 오페라 연주 가운데 가장 빼어났다. 수년간 구조조정 논란으로 몸살을 앓았던 서울시오페라단이 박세원 단장을 맞아들인 뒤, 의욕적으로 내놓은 ‘베르디 빅5’ 시리즈의 첫 작품. 우여곡절도 적지 않았지만, ‘가면무도회’(11월1~4일)부터 ‘라 트라비아타’ ‘운명의 힘’(2008년) ‘돈 카를로’(2009년)로 이어지는 베르디 시리즈 일정에도 조심스럽게 희망을 걸어볼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