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열정

4월10일 미국 뉴욕 카네기홀. 올 시즌 네 번째로 ‘바이올린 명인들(Violin Virtuosos)’ 시리즈에 초청 받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장영주·27)은 후반부 프로코피예프의 소나타 2번을 ‘메인 메뉴’로 내놓았다.

음표가 잠시 숨을 멈춘 곳에서도 사라 장은 끊임없이 어깨와 왼손을 움직이며 이미 다음 소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빈틈 없는 초절(超絶) 기교, 온몸을 타고 흐르는 박자감, ‘여(女)검객’처럼 격정적으로 휘두르는 활에 뉴요커들은 한껏 매료됐다.

세 차례 커튼 콜을 받은 뒤, 앙코르 곡으로 고른 곡은 비발디의 ‘사계(四季)’ 가운데 겨울 2악장. 가수 이현우의 ‘헤어진 후에’로도 친숙한 멜로디다. 카네기홀 객석에도 적막감이 감돌았다. 올해 비발디의 ‘사계’ 공연과 녹음을 앞두고 있는 사라 장이 미리 선보인 예고편이었다.

사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으로 꼽힌다. 사라 장이 이번에는 한국에서 ‘사계’를 본격 선보인다. 인터뷰에서 “2년 전부터 독학으로 악보를 통해 ‘사계’를 공부해왔다. 다음달 한국 공연에 이어 올가을 음반으로 팬들과 만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세계를 대표하는 신세대 바이올리니스트가 클래식 음악의 원류(源流)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무지치 합주단의 ‘사계’(필립스)는 이미 반세기 가까이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고, 영국의 괴짜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가 녹음한 ‘사계’(EMI)는 20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클래식 음반’으로 기록됐다. 한국에서도 정경화의 ‘사계’(EMI)가 10만 장 가까이 팔리며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사라 장은 비탈리의 ‘샤콘’ 같은 바로크 소품을 녹음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대형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곡이나 리사이틀에 치중했기 때문에 사실상 첫 바로크 도전이나 다름 없다.

“많은 연주자들이 수많은 녹음을 남겼기 때문에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죠. 음반 산업도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곡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가 말하는 바로크 음악의 매력은 ‘유연함’. “베토벤의 경우에는 모든 소절에 일일이 노트를 남겼고, 그 지시를 충실히 따라가기만 하면 될 정도로 꼼꼼한 작곡가였어요. 하지만 그 이전 바로크 시대의 악보에는 악상 기호나 지시가 거의 없어요. 연주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그는 “덕분에 재미 있고도 골치 아픈 작업이 될 것 같다”며 웃었다.

이번 ‘사계’에서 사라 장이 선택한 동반자는 ‘오르페우스 체임버 오케스트라’다. 말끔하고 단아한 해석으로 바로크와 고전파 시기의 음악에서 명성이 높다. 그는 “별도의 지휘자를 두지 않고 모든 단원이 음악 홀의 사운드 점검부터 악단 운영까지 직접 참여하기 때문에 실내악 정신에 가장 충실한 악단”이라고 말했다.

최근 ‘사계’는 현대적 악기보다는 바로크 시대의 옛 악기로 경박단소(輕薄短小)하게 접근하는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사라 장은 “음악은 읽을 수 있는 만큼 보이고, 들을 수 있는 만큼 들리는 것 같다”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건 싫다. 나만의 색깔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 5월 11일 대전문화예술의전당, 12일 세종문화회관, 13일 경기도문화의전당(수원),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1577-5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