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산행] 양평 벽계구곡

그러나 나는 나의 작업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흐르는 내의 이곳저곳에 선인들의 삶과 숨결의 흔적이 곳곳에 각인돼 있고, 이제 상류에서 흘러내려온 바위와 모래더미를 조금만 들추어도 그 현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어느 산 어느 골짜기, 능선, 내도 모두 이런 인연으로 얽혀져 이 강산을 이루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잡목과 풀잎 사이로 어느 날 보이는 짙은 청록색의 소(沼)가 그들 나름대로의 이름과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그래서 백현(양평군과 가평군의 경계)에서 내려다보이는 통방산의 모습을 그 산의 뼈대를 긁어모으듯이 여러 번 그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 글·그림 민정기 화가

한국 미술계의 중량감 있는 화백 네 분이 월간山 인기연재물 ‘그림산행’을 위해 의기투합, 이번호부터 독자들에게 다양한 그림을 선물한다. 그림과 산, 삶과 산, 땅과 사람에 얽힌 사연들을 화폭에 담아 지면을 통해 지상 갤러리로 전달키로 한 것이다. 계절에 따른 자연의 변화무쌍함, 감히 범접하지 못할 것 같은 경이로움, 그러나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아름다운 산하 등을 이미지로 담아내는 회화형식으로 유감없이 보여줄 예정이다. 애독자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 부탁드린다.

몇 해 전 양평으로 작업실을 옮기면서 지금은 한양대학교에 계시는 최종현 선생님과 현장답사를 시작하면서 나의 답사와 기행, 그리고 풍경을 화폭에 담는 그림들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님과는 물론 그 이전부터 면식이 있었으며, 웬만한 분들은 그분의 국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인물, 역사, 고미술 등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익히 알고 계시기도 하다.
나의 작업실은 양평군 서종면에 있는데, 바로 이 서종면 문호리에서 7,8km 북한강을 따라 올라가면 수입리라는 곳이 있고, 이 수입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 노문리라고 하는 곳까지 20여km 걸치는 내에 '벽계구곡(檗溪九曲)'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이 계시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구곡(九曲)이라 하면 산자수려하고 물돌이(수회·水回))가 심한 우리나라의 지형에 맞게 각각 굽어 돌아가는 천(川)의 굴곡을 1곡, 2곡 하여 그 지점을 정하고, 각각의 곡의 지형에 걸맞는 명칭과 그곳에 맞는 시, 그림 등을 제작하고, 자연의 형상을 인간의 삶의 굴곡과도 비유하며 그곳에서 수양하고 교육하던 조선시대 유가의 자연관이자 철학의 한 부분으로, 우리 땅에는 고산구곡, 화양구곡 등 알려져 있는 구곡만도 서른 곳 정도가  된다고 한다.


화서 이항로 선생이 경영하시던 곳

벽계구곡이라 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양평군 서종면 수입리에서 노문리까지의 20여km에 달하는 천에 위치하는 것으로, 화서 이항로 선생이 경영하시던 곳이다.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1792 정조16~1868 고종5) 선생은 조선왕조 말기의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의 한 분이시며, 서구 열강들이 앞다투어 강제로 개항을 요구하던 혼란한 개화정국의 시대에 직언자로서 우국과 존왕양이의 대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문하에서 척사위정과 창의호국운동의 중심인물이 많이 나왔다(면암 최익현, 중암 김평묵, 의암 유인석, 하거 양헌수,  등). 선생의 생가와 정사가 청화산(靑華山) 서쪽에 있다 하여 화서선생이라 불리워졌다.

지금은 가평군과 양평군으로 나뉘어 있지만, 예전의 양근현(용문산 줄기가 북으로는 장락산맥 줄기로 북한강과 만나는 지점과, 남으로는 백운봉 등으로 남한강과 만나는 지점, 그리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양수리를 잇는 삼각형 형국)에는 여러 천들이 계곡 사이를 흐르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긴 천으로 용문산에서 시작하여 북으로는 용문산, 고달산, 화야산, 고동산. 아미산, 남으로는 유명산, 중미산, 삼태봉, 통방산, 매곡산, 매화산 사이를 흘러 북한강과 만나는 수입리 일원을 벽계구곡의 일곡(一曲)이라 한다.

이 일대는 한여름이면 안개에 싸인 북한강 건너 남양주군의 산봉우리들의 연봉과 함께 오대산에서 시작한 그 수많은 연봉들이 이곳에 이르러 불끈 치솟아 오르다 북한강으로 빠지는 장관을 볼 수 있는데, 서울 근교에서 이러한 전경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실로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 생각한다.

이곡(二曲)은 벽계천이 일곡을 휘돌아 조금 들어간 곳으로 일곡을 외수입(外水入), 이곡을 내수입(內水入)이라 부른다. 삼곡(三曲)은 정자터라 불리는 곳으로, 예전에는 그곳에 정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곳을 정자터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 이유가 정자터 앞으로 너른 모래밭이 있고 널찍한 내가 물소리도 다정하게 소곤소곤 흐르며, 오랜 시간 물에 씻긴 큰 바위들이 군데군데 있고, 건너편 산은 전체 규모에 알맞게 큼직한 석벽이 서 있고, 석벽에 솟은 잡목 사이로 봄이면 진달래가 피어나 이곳 말고는 이곡과 사곡 근처에 어떤 곳도 지점이 될 만한 장소가 없다.

육곡 분설담이 벽계구곡의 중심

사곡(四曲)은 용소(龍沼)라 하는데, 삼곡에서 꽤 떨어져 있다. 곧장 내를 따라 가기에는 어렵고 왔던 길을 도로 나와 자동차길로 바른쪽의 내를 주시하며 가다보면 한여름에는 꽤 깊은 물이 고여 있어 짙은 녹청색을 내는 곳이다.
오곡(五曲)은 별소(鱉沼)라 한다. 역시 흐르던 물이 조용히 고여 있는 짙은 청록색의 소를 볼 수 있고, 그 앞에 규모가 좀 되는 바위에는 쇄취암(鎖翠岩·푸르름을 자물쇠로 묶었다)이라는 화서선생의 친필을 각한 것을 볼 수 있다.

오곡에서 찻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화서선생의 생가와 노산정사(蘆山精捨), 그리고 몇 년 전에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원을 받아 새로이 조성된 화서선생의 박물관 등을 좌측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앞으로 큰 느티나무를 보면서 조금 걷다보면 크지 않은 6.25 참전기념비가 보이고, 그 사잇길로 해서 내쪽으로 나가 조금 올라가면 육곡(六曲) 분설담(噴雪潭) 지역을 볼 수 있다.

분설(噴雪·눈을 토하는)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량이 많은 장마 이후의 여름에는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바위와 바위 사이를 통과하며 부딪쳐 하얗게 눈을 토해내는 듯한 현상과 오랜 세월 물에 씻긴 돌과 그 표면의 아름다운 무늬들을 볼 수 있다. 이곳의 한 바위에 분설담이라고 화서선생이 쓰셨고, 그 외에도 명옥정(鳴玉亭), 낙지암(樂志岩), 주자의 시 ‘애애성중만고심’(?乃聲中萬古心·주자의 무이구곡가의 한 싯귀로 노 젓는 소리 가운데에 옛 생각이 나서 세상명리를 잊고 자연히 심성이 안정된다는 뜻)을 화서선생이 친필하시고 각한 것들을 볼 수 있다.

또한 화서선생의 생가를 왼편으로 두고 오른쪽으로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르면 화서선생을 모시는 노산사가 있고, 그 앞의 풍경을 편히 앉아 볼 수 있는 곳에 둥그런 돌(霽月臺)에 화서선생의 친필시(莫遺微雲 點綴練光 極虛極明 以配太陽 丁未夏 華西銘·조그마한 구름이라도 보내서 달빛을 손상하지 말라. 지극히 공허하고 지극히 명랑하여 이럼으로써 태양에 配偶가 된다)를 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육곡이 생가, 정사, 사당 등이 있어 벽계구곡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산의 뼈대를 긁어모으듯 여러번 그렸었구나’

칠곡(七曲)은 육곡에서 내를 따라 상류로 올라가다 좌측 산에 붙어 내를 따라 가는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형성된, 문의 형상을 한 돌 사이를 걷게 되는데, 이곳에 5~6년 전만 해도 바위에 석문(石門)이라는 화서선생의 친필각을 볼 수 있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그 지역에 주택이 몇 채 들어서면서 이 부분이 훼손되어 버렸다.
칠곡에서 찻길로 다시 올라와 가다보면 우측으로 묘한 형상을 한 산세를 볼 수 있는데, 그 아래로는 물길이 몹시 빨리 흘러 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으로 이곳을 팔곡(八曲)  속사천(續斜川)이라 한다.

마지막 구곡(九曲)은 일주암(一柱岩))이라 하는데, 역시 물길을 따라서는 올라가기가 어렵고 찻길로 가다가 물길쪽으로 좁은 길로 들어서서 차를 주차시키고 내를 따라 산길을 걷다보면 차츰차츰 크고 험한 바위들이 물가에 있고, 숲길을 조금 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견딘 괴이하게 생긴 입석을 볼 수 있다. 입석을 뒤로 해서 산길을 오르면 통방산을 오를 수 있도록 주민들이 조성한 등산로도 볼 수 있으니 그곳에서 통방산 등정을 시도해 봄직하다.

구곡을 벗어나 상류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이제와는 형국이 다른 아주 편편하고 평범한 경치를 볼 수 있어 벽계구곡이 이곳에서 끝나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구곡을 여기에 설정한 이유를 공감할 수 있다.

지금도 한여름 뙈악볕과 푸른 숲 사이를 누비면서 최 선생님과 구곡을 찾아 헤매던 때가 눈에 선하다. 물론 이곳은 아시다시피 한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모이고 곳곳에 전원주택과 모텔, 카페가 들어서 있다. 서종면이 어디인가. 지금은 아마도 서울 근교에서는 전원주택단지로 제일 선호도가 높은 곳이 아닌가. 20년 전만 해도 북한강 건너편은 도로도 포장되어 있고 호텔 등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이곳은 먼지 나는 비포장도로와 소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또 지금은 노문천이 상류에서 행해진 골프장 공사 등으로 모래와 자갈이 흘러 내려와 그 깊이가 옛날에 비해 너무나도 얕아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