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현대 넘나드는 오페라 연출의 거장 피에르 루이지 피치

1984년 12월 이탈리아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 마땅히 객석이 있어야 할 극장 1층은 모두 비워버렸다. 대신 예수의 고난 행렬을 묘사하는 기나긴 길이 객석 중앙을 가득 메웠다. 그 행렬의 끝에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가 올라갔다. 사순절과 부활절 기간에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되는 바흐의 ‘요한 수난곡’을 대담하게 극으로 연출한 것이다.

2004년 2월 이탈리아 피아센차의 엑스포장.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를 공연하면서 연출가는 ‘18세기 스웨덴 국왕 암살’이라는 원작 설정 대신, 대형 오픈 카를 무대 중앙에 올려 보냈다. 등장 인물은 대부분 회색 군복이나 양복을 입었고, TV 카메라맨이 요란스럽게 차량을 쫓아갔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연상시키는 파격적 연출이었다.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해석으로 라 스칼라와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빈 국립 오페라 극장 등 최고의 오페라 무대를 반세기 넘도록 지키고 있는 이탈리아의 명 연출가 피에르 루이지 피치(Pier Luigi Pizzi·77). 그가 드디어 자신의 작품을 들고 내한한다.

다음달 12~17일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초연되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가 첫 무대다. 국내에서는 카스트라토(거세 가수)를 다룬 영화 ‘파리넬리’에서 아리아 ‘울게 하소서’로 친숙한 작품이다.

21세 때인 1951년 무대 감독으로 출발한 그는 의상과 연출까지 끊임없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온 오페라의 거장(巨匠)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씨는 “현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잔재주 없이 정공법으로 승부하며, 무대·의상·연출을 겸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예술가”라고 평했다.

피치는 서면 인터뷰에서 “무대나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것은 피상적이라고 늘 생각했고 다닌 적도 없다. 전기 배선부터 무대 장치까지 모든 일은 현장에서 배웠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던 지휘자 정명훈의 1990년 개관 기념작 ‘트로이 사람들’(베를리오즈)의 연출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듬해에도 같은 극장에서 생상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를 함께 작업하며 호흡을 맞춰왔다. 그는 정명훈에 대해 “영혼을 공유하면서 일할 수 있었던 음악가”라고 말했다.

피치의 무대는 이번 ‘리날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올가을 ‘라 트라비아타’ 등으로 3년 연속 이어질 계획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정우씨는 “외국 연출가가 장기적 계획을 갖고 자신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선보인다는 점에서 국내 오페라 공연 풍토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02)587-19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