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졸(守拙)의 반란’ 초단 돌풍 거세다

바둑계의 품계를 군대식 계급에 비유하자면 초단은 일등병쯤 된다. 九단은 대장이다. 그 중간에 새카맣게 높은 선배, 고단자들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다. 초단의 애칭은 수졸(守拙·졸렬하게 지킨다는 뜻). 그런데 이 별명이 무색하게도 갓 입단한 애송이 초단들이 선배들을 향해 연일 끔찍한 하극상(?)을 펼치고 있다.

 

30일 벌어진 제12회 LG배 세계기왕전 통합예선에서도 한상훈(19)이란 ‘초단 국가대표’가 탄생했다. 초단의 LG배 본선 상륙은 97년 이세돌, 2002년 윤준상 이후 세 번째. 이날 결승전 상대는 역시 17세의 소년 초단 윤찬희였다. 결승에 오르기까지 이들 두 신참 초단이 꺾은 상대들의 단위를 모두 합하면 물경 45단에 달한다.

한상훈 초단의 올해 전적은 17승 2패로 국내 217명 프로들 중 승률 1위다. 왕위전에선 다음 주 박영훈을 상대로 결승 진출 티켓을 놓고 싸울 예정. 프로들의 선망의 표적인 바둑리그 예선을 가볍게 통과하자 신생 팀 대방 노블랜드는 그를 2순위로 모셔가는 파격을 보였다. 연수 기간을 제외하면 프로 생활 2개월이 채 못 되는 ‘올챙이’의 화려한 비상이다.

왕위전 8강까지 올랐던 윤찬희 초단도 올 들어 7할대의 고공 승률을 작성하고 있다. 입단 2년차 때 세계대회(삼성화재배) 진출로 화제를 몰고 왔던 배준희 초단은 올해 바둑리그 제일화재 팀의 당당한 2장으로 지명됐다. 그 밖에도 박승화 김수용 박정환 등 ‘九단급 초단’으로 이름을 날리는 10대 소년들이 즐비하다. 16세 소녀 박지연 초단은 노장 대 여류 경연장인 제1회 지지옥션배 개막 벽두 파죽의 3연승으로 남성 고참 선배들을 얼어붙게 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길까. 프로의 좁은 문이 첫째 이유로 꼽힌다. 연구생 3조까지의 30여 명 수준은 기성 프로들에게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갖췄으나 연간 입단 티켓 수는 최대 9장뿐이다. ‘병목’을 탈출해 프로가 되는 순간 펄펄 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둘째는 수년 전부터 정착된 입단 후의 체계적 관리 시스템이 꼽힌다. 프로가 된 후에도 이들의 출신 도장이나 사설 연구회에서 연구생 시절의 강도로 단련시킨다는 것.

세 번째 이유로 지적되는 것이 기전의 속기(速棋)화다. 스피드 시대에 맞춰 상당수 기전들의 제한 시간이 대폭 단축됐다. 이 경우 노장의 연륜보다는 청년 특유의 순발력이 훨씬 더 위력을 발휘한다는 게 정설로 돼있다. 입단 직후 명인전 도전권을 따낸 서봉수 이후 초단 돌풍 현상은 꾸준히 지속돼 왔지만 그 양상은 판이해졌다. 옛날엔 일회성, 단발성이던 것이 요즘엔 집단적, 동시 다발적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초단들의 맹활약은 단의 권위 실추로 이어진다. 입단대회 또는 단위 제도 자체를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까지 나오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프로 입단 문호의 단계적 확대, 준 기사제 도입에 의한 연구생 숨통 틔워주기 등이 대안으로 좁혀진다. 대국료 없는 기전도 일부 수용해 프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것으로 병목 현상을 해결하자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 현 체제가 계속되는 한 초단들의 돌풍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