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기자의 촉촉한 시선] 경쾌한 청춘예찬

서른 즈음이었다. “20대가 끝난 뒤에도 과연 사랑이 존재하느냐”고 나름 우수에 젖었던 시절, 마흔 언저리의 선배는 분위기를 다잡으며 우아하게 위로했다. 서른에는 서른의 사랑이 있고, 마흔에는 마흔의, 쉰에는 쉰의 사랑이 있는 거라고.(물론 다음날 아침, 앞으로 술 먹고 흰소리하지 말라는 호통을 내지르기는 했지만)

철없던 시절 일화를 언급한 까닭은 어제(3일) 개봉한 영국 로맨틱 코미디 ‘캐쉬백’(Cashback) 때문이다. 서른의 성장통에게 무안하게도, 열정이 남아 있던 그 시절이 지금은 까마득하다. 날렵했던 복부는 팽만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체형이 됐고, 혈기방장(血氣方壯)했던 테스토스테론은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어떤 청춘 영화를 봐도 큰 자극을 받지 못했다는 게 솔직한 고백인데, ‘캐쉬백’을 보면서는 예외적인 경험을 했다. 스물 남짓 주인공들과 그들이 벌이는 사랑이 어찌나 건강하고 귀엽던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미학적 성취나 작품성 같은 진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성적(性的) 판타지를 영화 선택의 으뜸 기준으로 놓는 남성 관객용 팁 하나. 일부 열혈 여성 관객들은 ‘버럭’ 하겠지만, 이 청춘 코미디의 즐거움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여체로부터 비롯된다. (물론 18세 이상 관람가다.) 시간을 정지시킬 수 있는 타임 스토퍼(time stopper)인 미대생 벤은 대형마트의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해 여성들의 나신(裸身)을 스케치한다. 누구 말마따나 필요 없는 지방이라고는 0.1g도 없어 보이는 완벽한 균형의 여체가 인터넷 팝업(pop-up)창처럼 줄기차게 튀어나온다. 그렇다고 음란한 생각을 품지는 마시기를. 이 영화가 여체를 묘사하는 방식은 도색잡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니까. 실오라기 하나 없는 육체를 전후좌우에서 클로즈업할 때도, 카메라는 절대 기품을 잃지 않는다.

감독 숀 엘리스는 원래 패션지 사진작가였다. ‘하퍼스 바자’ ‘아레나’ ‘보그’를 종횡무진 누비며 ‘영국 톱10 사진작가’(2005년 주간지 인디펜던트 온 선데이 선정)에도 꼽혔던 인물. 아름다운 순간을 잡아내 붙들어매는 예술가의 시선과 첨예하게 트렌드를 읽어내는 장사꾼의 촉수가 제대로 만났던 것일까. 여체를 제외하고도 ‘캐쉬백’의 각 장면은 하나하나가 액자 속에 넣어 따로 보관하고 싶을 만큼 감각적이다. 게다가 이 대형마트 아르바이트생들이 지루한 밤 근무를 때우기 위해 창안한 놀이와 만담은 그 어떤 오락프로그램보다도 더 배꼽을 잡게 만들었고.

그 선배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그의 사랑론(論)보다는 ‘캐쉬백’이 더 큰 위로가 됐다. 20대는 물론이고, 열정이 희미해져 버린 중년에게도 강력히 추천한다. 단, 영화 보기가 쉽지 않다. 전국에서 오직 한 곳에서만 개봉했다. 종로 시네코아. 작은 규모의 영화인데다 감독도, 배우도 우리에겐 낯선 이름인 탓이다. 2004년 오스카 최우수 단편 후보에 올랐던 18분짜리 작품을 같은 감독이 101분짜리 장편으로 늘렸다. 가끔은 주관적이고 폭력적인 지지도 이해해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