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만나 ‘사랑’을 지휘한 마에스트로

연주가 끝나자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서른 다섯 살 아래의 청년 피아니스트 김선욱을 힘껏 끌어안았다. 김선욱은 정명훈이 이끌고 있는 오케스트라를 향해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하며 경의를 표했다.

지난 2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음악 감독 정명훈)의 내한 공연. 협연자 김선욱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4번을 골라들었다. 화려한 기교나 낭만적 감성에 치우치지 않고 선 굵고 남성적인 레퍼토리에 마음껏 도전하는 점이야말로 김선욱이 또래 아티스트와 차별화하는 대목이다.

김선욱은 ‘베토벤’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았다. 곡을 무겁게 가져가기보다는 약동하듯 가볍게 건반을 달려나갔다. 1악장에서는 청춘의 유려함이 그대로 묻어났고, 2악장 ‘안단테 콘 모토(Andante con moto)’에 이르자 유려하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다 자란 척, 다 안 큰 척하며 수시로 표정을 바꾸는 건 19세 피아니스트의 개성이자 ‘특권’이었다.

김선욱의 독주 때는 지휘자가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피아노가 잠시 숨을 죽인 대목에서는 김선욱이 오케스트라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객석에 앉아있던 첼리스트 정명화는 “꼭 동생(정명훈)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협주곡이 끝난 직후, 기립 박수는 3층까지 파도를 이뤘다.

2부에서 모국(母國) 레퍼토리로 돌아간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은 ‘환상 교향곡’을 자유분방한 필치로 그려냈다. 베를리오즈가 자신의 정념과 열정, 욕망과 좌절까지 그대로 담아내며 낭만주의 교향악이 고전파 시기와 어떻게 다른지 입증한 걸작이다.

지휘자 정명훈도 시계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앙상블을 맞추기보다는, 오케스트라 특유의 유려한 현악과 명징한 관악을 있는 그대로 존중했다. 독일 관현악의 장중함에 익숙해있던 관객들에게는 모처럼 신선한 ‘프랑스 음악 나들이’였다.

앙코르로 포레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가운데 전주곡을 들려주기 앞서 정명훈은 “음악에서 언제나 중요한 건 사랑이다. 그 마음을 관객들에게 전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아뿔싸, 형수(멜리장드)와 동생(펠레아스)의 비극적 만남을 이상적 사랑으로 설명하다니…. 마에스트로는 무슨 숨은 뜻을 갖고 있었을까.

하지만 오페라 ‘카르멘’의 흥겨운 서곡이 두 번째 앙코르로 울려 퍼지자 객석에서는 ‘라데츠키 행진곡’처럼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3년 전 국립오페라단의 ‘카르멘’에서 연주를 맡았던 이들의 명연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