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한 플레트네프…‘표정 협연’은?

“재능이 넘치는 젊은이다. 소나타는 내 해석과 전혀 달랐지만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는 왜 그렇게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마치 연주를 고문(拷問)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 같다.”

러시아의 전설적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테르(1915~1997)는 1986년 자신의 음악 수첩에서 후배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Mikhail Pletnev·50)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거장의 반열을 꿈꾸는 플레트네프도 20여 년 전에는 분명 ‘재능 넘치는 젊은이’였겠지요. 플레트네프 특유의, 무심한 듯하면서도 냉소적인 표정을 알고 있는 팬이라면 이 구절에 자연스럽게 웃음 짓게 됩니다.

2년 전, 내한 리사이틀에서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7·8번을 들려주면서 청중에게 제대로 박수 칠 시간도 주지 않았지요. 곡 사이에 끊지도 않고 건반을 누르던 그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플레트네프가 최근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5곡) 음반(DG)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예술 감독을 맡았던 러시안 내셔널 오케스트라(RNO)와 호흡을 맞춰 협주곡 1·3번을 먼저 내놓았습니다. 지난해 9월 작곡가의 고향인 독일 본에서 열린 베토벤 축제 실황입니다.

협주곡 1번 1악장부터 플레트네프의 피아노는 미려(美麗)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지막 3악장에서 그의 독주는 아찔할 만큼, 원작이 금을 그어놓은 경계선을 마구 넘나듭니다.

어떤 곡을 들어도 그의 손끝에서 나온 솜씨라는 걸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플레트네프는 건반 위에 강한 개성을 쏟아내는 연주자입니다. 같은 곡의 명연으로 이름 높은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Michelangeli) 이후, 어쩌면 가장 ‘깍쟁이’ 피아니스트일 지도 모릅니다.

오는 23일 예술의전당에서 플레트네프가 이끄는 RNO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과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을 들려줍니다. 이번엔 아쉽게도 지휘봉만 잡지만, 한국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협연자로 나섭니다.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지휘자와, 너털웃음에 가까울 만큼 웃음의 폭이 큰 피아니스트가 빚어낼 ‘표정 협연’에도 기대가 쏠립니다. 공연 문의 (02)541-6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