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기자의 촉촉한 시선] 칸에서 보내는 엽서

해외출장을 갈 때면 그곳에서 엽서를 보내는 습관이 있습니다. 현지 우표를 풀로 붙인 뒤, 그 고장의 풍광을 담은 사진 뒤에 간단히 적어 보내는 몇 줄의 안부.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가 그 역할을 빼앗은 지 오래된 세상이지만, 그래도 시간차를 두고 받아보는 육필(肉筆)의 반가움이 있지 않나요.

칸에 도착한 지도 오늘(24일)로써 열흘째. 안부 엽서에 꼭 적어 보내고 싶은 영화 한 편을 조금 전에 만났습니다. 경쟁부문 스물두 편 중의 하나인 프랑스·미국 공동제작 영화 ‘잠수종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 제목만 듣고 무슨 해저 탐사영화라거나 자연 탐구영화라고 오해하지는 마세요. 그 안에는 희귀하고 감동적인 소통방식이 있었습니다.

화가 출신인 뉴욕의 감독 줄리앙 슈나벨(Schnabel)이 연출한 이 휴먼 드라마는 눈의 깜박거림만으로 소통하는 사내의 이야기입니다. 사내의 이름은 장 도미니크 바비(Bauby). 프랑스판 엘르의 성공한 편집장이었죠. 카리스마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중년남자가 지금은 말 한 마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습니다. 원인불명의 쇼크로 마비가 온 그의 몸에서 유일하게 말을 듣는 건 눈꺼풀뿐. 처음 20분 동안 `스크린에는 바비가 볼 수 있는 시야만 나타납니다. 손상이 심한 왼쪽 눈의 괴저(壞疽)를 막기 위해 눈꺼풀을 한 땀 한 땀 꿰맬 때는 스크린까지 차례차례 어두워지죠.

그런데 어떻게 대화를 나누냐구요? 가령 이런 겁니다. 눈을 한 번만 깜박이면 “예”, 두 번 깜박이면 “아니요”. 대화라기엔 너무 유치하다구요? 다음 단계도 있습니다. 알파벳을 순서대로 듣다가 원하는 철자가 나타나면 눈을 깜박입니다. 가령 I를 원한다면 A,B,C…를 지나쳐 I를 상대방이 부르는 순간 눈을 깜박이는 거죠. 이 훈련을 받은 바비가 처음 완성한 문장은 “I want die(죽고 싶다)”였습니다.

영화는 시종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묻습니다. 태생적으로 언어감각과 유머감각이 출중했던 이 사내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습니다. 해저 잠수종(潛水鐘)에 갇힌 나비 신세이지만,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고, 지중해에서 파도타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던 바비는 놀라운 결심을 합니다. 바로 책을 쓰는 것이죠. 눈꺼풀을 한 번씩 움직여서 만드는 철자로 수백 쪽 자서전을 완성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당신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놀라운 영화가 실제 사고를 당했던 엘르의 편집장 바비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은 꼭 말씀 드려야겠군요. 이 영화가 주는 감동의 절반 이상이 그 역할을 했던 프랑스 배우 매튜 아말릭(Amalric)의 연기 덕분이라는 사실도요. 실제로 책은 97년에 출판됐고, 바비는 그 사흘 뒤에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이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받을까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언제 상영될지도 아직은 미지수구요. 그런데도 이 지중해의 작은 소도시에서 본 한 편의 영화 이야기로 안부를 전하는 것은, 바비의 노력과 에너지가 당신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라는 까닭입니다. 터무니없는 낙관도 아니고, 손쉬운 냉소도 아닌, 실화가 지닌 삶의 에너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