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이 전시] 채운듯 비운듯… 화폭에 담은 삶

푸르스름한 화면에 솜털 같은 흰 원이 떠다닌다. 가득 찼는데 꽉 찼다는 느낌 없이 홀가분한 이 유화(油畵)에 서양화가 이길혜(58)씨는 ‘시간의 반추(Reflection of Time·사진)’라는 제목을 붙였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운해(雲海)를 마음에 두고 그렸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연꽃이라고 하고 어떤 분은 원이라고 하세요.”

구름이면 어떻고 연꽃이면 어떤가. 그녀가 정말 화폭에 담은 건 자신의 생애다. 이씨는 OECD 대사를 지낸 구본영(60) 전(前) 과학기술처 장관의 아내다. 나오라는 자리도 많고 챙겨야 할 인사도 많을 것이다. 그걸 뿌리치고 지난 1년간, 수도하는 승려처럼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 2~3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이씨는 “저는 사실, 늘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라고 했다.

“남편이 공직에 있어서 항상 긴장된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그림에만 몰두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지요. 호사스런 자리에도 가 봤지만 저는 혼자 틀어박혀 그림만 그린 지난 1년이 가장 행복했어요.”

이씨는 오는 14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에 유화 20여 점을 건다. 1981년, 1991년에 이어 세 번째 개인전이다. 군말을 벼려낸 하이쿠처럼 단순하고 또 차분한 이 작품들을 이씨는 전부 ‘시간의 반추’라는 화제(畵題)로 묶었다.

“나이 들수록 복잡하게 뭘 자꾸 그리기 싫어요. 그저 캔버스에 색을 바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관조의 세계랄까, 아무 생각 없이 푹 빠져서 그리는데, 다 그리고 죽 펼쳐놓으면 기쁨도 보이고, 슬픔도 보이거든요.” 문의 (02)720-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