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는 늙지 않는다

성악가들은 40~50대에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고 리사이틀에 치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페라 한 편을 공연하기 위해서는 연습 기간만 짧아도 2주, 길게는 6~8주가 걸리는데다 목소리부터 캐릭터 분석과 연기까지 부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일찍 절정을 맞았던 칼라스는 42세 때 마지막으로 오페라에 출연했다.

그루베로바는 까다로운 기교를 필요로 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명성을 떨쳤던 성악가다. 특히 ‘밤의 여왕’의 아리아로 유명한 오페라 ‘마술 피리’(모차르트)는 두 차례나 공연 영상을 제작했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음악 칼럼니스트 박종호씨는 “예순을 넘는 나이에 유럽 최고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훌륭한 모습을 보인 건, 그만큼 성악가로서 자기 관리에 엄격하고 꼼꼼했다는 의미”라며 “지금까지 나온 ‘노르마’의 영상물 가운데 단연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오페라에는 정년(停年)이 없다. 지난해 1월 유럽 최고의 명문 오페라좌(座) 가운데 하나인 독일 뮌헨의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에 나이 예순의 ‘프리마 돈나’가 무대에 올랐다. 단역도 아니었다. 1946년생의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Gruberova)가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 가운데 동명(同名) 타이틀 역을 맡은 것이다.

19세기 작품인 ‘노르마’는 올해 타계 30주기를 맞은 전설적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잠에서 깨워낸 이후, 모든 소프라노에게 도전 과제로 꼽혔다. 까다로운 성악적 기교와 함께 오페라 극장을 제압할 수 있는 카리스마와 성량(聲量)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환갑을 내다보는 소프라노가 이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세계 오페라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최근 이 공연 실황이 DVD 영상(DG)으로 국내 출시됐다.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로 너무나 친숙한, 1막의 명(名) 아리아 ‘정결한 여신이여’에서 그루베로바는 고음에서도 특유의 고운 목소리 결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때로는 힘에 부친 듯 호흡을 길게 끌고 가지 못하지만, 조국과 연인 사이에서 엇갈리는 운명을 노래해야 하는 2막에서는 40년을 내다보는 무대 경력에 걸맞은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뮌헨 오페라 팬들의 박수갈채는 그루베로바에게 집중됐다.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67)의 ‘말년 도전’도 후배 성악가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흔히 ‘세계 3대 테너’로 꼽혔던 루치아노 파바로티(72)와 호세 카레라스(61)는 이미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했지만, 도밍고는 테너보다 낮은 음역인 바리톤 배역까지 도전하며 자신의 레퍼토리를 확장하고 있다.

도밍고를 ‘역할 모델’로 삼으며 성악을 꿈꿨던 후배 테너 롤란도 빌라존의 최근 음반(EMI)에서는 직접 지휘봉을 잡았고, 미국 워싱턴 국립 오페라와 로스앤젤레스 오페라단의 총감독을 겸임하고 있다. 현역 성악가와 지휘자, 음악 행정가의 ‘1인 3역’을 소화하고 있는 셈이다. 음악 칼럼니스트 유정우씨는 “고음 테크닉에서는 다소 기량이 쇠퇴했을 지 몰라도 도밍고는 지금도 탄둔의 ‘진시황제’ 같은 신작에 도전하고 있다”며 “성악가뿐만 아니라 음악가로서도 예술성과 대중성이 행복하게 만나고 있는 경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