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경의 패셔니스타 인 시네마] (1) 엄앵란

유명 패션 디자이너 조성경의 '패셔니스타 인 시네마'를 신설해 스크린 디바들의 패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합니다. 여배우의 화려한 패션을 되짚으며 옛 영화의 추억을 되살리는 장이 될 것입니다. < 편집자 주>

영화와 패션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특히 복고풍 패션이 다시 유행하고 있는 요즘, 미모와 실력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들과 영화 속 패션 이야기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50년대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할리우드에 마릴린 먼로와 오드리 햅번, 제임스 딘이 있었다면 충무로엔 김지미씨와 엄앵란씨, 신성일씨가 있었다.

김지미씨와 엄앵란씨는 500여편의 작품 중 단 두편만 같이 출연했을 정도로, 팽팽한 라이벌이었다. 그 당시 여배우들에게는 패션은 곧 경쟁자를 이기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홍보의 시작이었다.

엄앵란씨가 영화계에 데뷔한 것은 대학 1학년 때. 당시‘단종애사'를 준비 중이던 영화사에 놀러갔다가 전격 여주인공에 캐스팅됐다. 전창근 감독이 단종 역할을 맡은 남자배우와 키를 대보더니 바로 단종비를 맡긴 것이었다. 30년대 여배우였던 어머니 노재신씨의 끼를 물려받았던 엄앵란씨는 당시 유일한 대학생 여배우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지적인 배우라는 평을 들었는데, 그녀는 영화 속 패션의 시작을 알리는 1호의 패셔니스타였다.

엄앵란씨는 극중 잠옷 하나까지도 디자이너와 상의해 따로 제작했다. 그 당시 원단이 변변치 않았던 우리나라의 현실 때문에 스스로 홍콩과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원단과 신발, 모자 등의 소품을 직접 구입해오기도 했다. 편당 50만원 정도의 개런티 중 50% 이상을 의상제작비로 사용했던 엄앵란씨는 촬영장에 의상용 트렁크를 3개 이상 들고 다녔다.

당시 촬영 현장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스태프들이 지금처럼 촬영버스는 커녕 트럭 짐칸에 타고 다닐 정도였다.

여배우들도 겨울 촬영을 할 때는 군용담요로 찬 바람을 견뎠다. 재미있는 일화는 당시 혼자만 촬영장에서 예쁜 담요를 덮고 도도하게 앉아있는 엄앵란씨에게 3년 후배인 신성일씨가 "그 이상한 건 왜 덮고 있냐"고 했단다. 이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체크 울 원단의 안감으로 인조모피를 넣어 지금의 망토처럼 만들어 하나는 신성일씨에게 선물하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이용했다고 한다. 이 옷이 지금도 유행하고 있는 영국풍 망토의 원조이며 최초의 커플룩이었다하니, 진정한 충무로의 제1호 패셔니스타라 할 수 있다. 특히 의상을 협찬에만 의존하는 요즘 배우들은 엄앵란씨와 비교해보면, 남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패셔니스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패션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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