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수도원 적신 한국의 클래식

독일 라인강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에버바흐(Eberbach) 수도원은 12세기에 건립된,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은 수도원 가운데 하나다. 중세를 배경으로 핏빛 연쇄 살인을 그린 영화 ‘장미의 이름’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수도사 윌리엄 역을 맡은 배우 숀 코너리의 눈빛이 모퉁이를 돌아나올 것만 같다. 900년에 가까운 역사의 에버바흐 수도원이 한국의 연주 단체를 ‘음악 손님’으로 맞이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음악 감독 김민)은 올해 20주년을 맞은 독일 라인가우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지난 2005년에 이어 두 번째다. 안네 소피 무터,바딤 레핀(이상 바이올린), 마르타 아르헤리치, 엠마누엘 액스(이상 피아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등 세계 유수의 음악인과 단체만 선별해서 초청하는 이 페스티벌은 작년에 세계 음악 팬 12만 명을 불러들일 정도로 유럽 정상급 음악제로 꼽힌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은 27일 무대에서 유럽의 음악 팬을 상대로 ‘정공법(正攻法)’을 펼쳤다. 이름은 ‘바로크’이지만, 과감하게 ‘현대 음악’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꾸민 것이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와 윤이상(1917~1995),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1905~1963)과 윌리엄 월튼(1902~1983) 등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D장조를 제외한 4곡 모두 20세기 작곡가의 작품일 정도로 곡 선정에 심혈을 쏟았다.

첫 곡인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8중주를 위한 두 개의 작품’에서 이 합주단은 작곡가 특유의 직선적인 공격성을 그대로 현(絃)에 담았다. 특히 바이올린과 첼로 파트가 서로 빠르게 대화를 주고 받듯이 긴장감을 살려나가는 2악장 ‘스케르초’가 끝나자 유럽 음악 팬들의 갈채가 쏟아졌다. 독일에서 활동 중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19)양이 협연한 하르트만의 ‘바이올린과 현악을 위한 장송 협주곡’은 이 날 콘서트의 백미였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촉발된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음울한 풍경을 담아낸 문제작을, 김수연은 19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고 정교하게 묘사했다. 특히 슬픔에 가득찬 2악장에서 분노로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3악장으로 표정을 바꾸는 대목에서는 성숙함이 한껏 묻어 나왔다.

사뭇 진지한 콘서트에 유럽 관객들이 먼저 놀랐다. 2부에서 하이든의 고전적인 첼로 협주곡(첼로 백나영)이 끝나자, 수도원을 가득 매운 청중 1200여 명은 안도감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 날 콘서트는 핀란드 낭타리 음악제, 룩셈부르크 에히터나흐 음악제, 독일 슈파이어 음악제에 이어 2주에 걸쳐 서울바로크합주단이 펼쳤던 유럽 투어의 종착점이었다. 이 악단은 1965년 창단 이후, 랄프 고토니와 시프리앙 카차리스 같은 명(名) 피아니스트들과 교분을 쌓으며 지금까지 90여 차례의 활발한 해외 투어를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