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래동 철공소 골목, 예술에 녹았다

‘영원철강’ 골목 앞에서는 행위예술가 문재선씨가 머리에 꽃띠를 두르고 20㎏짜리 거대한 철봉을 들고 격렬하게 움직였고, 색소폰 연주자 4명은 팝송 ‘에레스 투’와 ‘문 리버’를 감미롭게 연주했다. 한 골목 건너 ‘형제샤링’ 앞에서는 창작집단 ‘환’ 단원들이 목재 사각틀에서 마임 퍼포먼스를 벌였다. 철공소 아저씨도, 식당 아줌마도 즉석에서 관객이 됐다. 용접 불꽃과 쇳내음으로 가득한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철재상가는 지난 주말(6월29~30일) 실험정신 가득한 야외 극장이었다.

문래동의 젊은 예술가들이 철재상가 골목 구석구석을 돌며 즉석 마임·연극 등 공연을 펼친 ‘경계 없는 예술프로젝트@문래동’. 이 동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문화행사’였다.

문래역 주변 녹지공원과 아파트단지에서 모퉁이를 돌면, 시간이 20년은 멈춘 듯한 풍경의 철재상가가 나온다. ‘스테인리스’ ‘금형’ ‘철강’ 등 간판을 달고 있는 1층짜리 소규모 공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고, 금속 자재들을 잘라내기 위한 전기톱이 부지런히 돌아간다.

이 철재상가는 1960년대 급속한 공업화로 영등포 일대에 공장들이 몰리면서 형성됐다. 공사용 철근, 난로의 연통부터 놀이터 미끄럼틀까지 온갖 금속 제품을 만들어내 ‘철강 메카’ 소리까지 들으며 80년대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곳 터줏대감들은 한결같이 “잘 나갈 땐 전국에서 제품을 실으러 몰려드는 트럭들로 새벽부터 붐볐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90년대부터 서울 바깥으로 공장들이 빠져나가면서 철재상가는 쇠락했다. 아파트와 빌딩이 하나 둘 들어섰고, 지금은 139곳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구체적 개발 계획이 정해진 것은 없지만, 나머지 상가들도 결국 이전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적지 않다.

그런 문래동에 작은 변화가 생겨난 것은 2003년부터. ‘저렴한 임대료’라는 이점을 안고 ‘예술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퍼포먼스 소로’ ‘창작집단 환’ ‘경계없는 예술센터’ 등 젊은 예술집단 6곳이 이웃이 됐다. ‘경계 없는 예술프로젝트@문래동’은 이들의 공식 신고식이었다.

행사를 기획한 이화원 경계없는 예술센터 대표(연극평론가·상명대 공연학부 교수)는 “문래동에서 문화 공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프랑스는 철도역이었던 오르세 미술관을 비롯해 무기공장·제철소·용광로였던 곳들이 유명 예술공간으로 태어난 경우가 많아요. 이곳에서 지역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는 공공예술을 구현하고 싶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예술인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철재 골목만을 위한 마임·퍼포먼스·연극을 밤새 연습했다. 공장들을 일일이 돌며 행사를 알리고 영업에 방해될까 미리 양해를 구했다. 관할 영등포구(구청장 김형수)도 작은 축제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적극 도왔다.

‘경계없는 예술프로젝트@문래동’의 하이라이트는 지난달 30일 오후 3시 홈플러스 문래점 앞에 세워진 ‘희망나무’. 문래동에서 얻은 스테인리스로 만든 2.5m 높이의 세 그루 희망나무는 문래동 사람들의 소통과 화합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지역주민들의 소망이 담긴 800여 개의 쪽지가 달렸다.

예술가들은 “많은 업체들이 공연에 필요한 철재와 도구 등을 후원해주며 행사를 든든히 도왔다”며 고마워했다. 철재상가 사람들 반응도 좋았다. 선우찬씨는 “예술에는 문외한이지만, 판에 박히지 않은 공연들이 맘에 든다”며 “앞으로 이런 행사들이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로를 관할하는 종로구 혜화동장을 지냈던 김용선 영등포구 문화체육과장은 “비싼 임대료를 이겨내지 못하고 젊은 예술가들이 탈출한 대학로가 활력을 잃는 것을 지켜봤다”며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예술가들이 문래동을 서울의 독창적 문화 명소로 가꿨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