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경의 패셔니스타 인 시네마] (1) 엄앵란 ②

이 칼럼을 쓰기 위해 엄앵란씨와 여러차례 인터뷰를 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녀가 모든 작품의 촬영 에피소드는 물론 의상의 색, 원단, 디테일까지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엔 배우들이나 스태프나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진행했다. 너무 많은 영화를 한꺼번에 찍었으니 감독들도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본인의 영화를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매니저나 코디네이터도 없이 혼자 모든 것을 준비해야 되는 배우들은 그만큼 많은 준비를 힘들게 해야했다. 영화 의상팀이 있기는 했지만, 전통 한복을 지원해주는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엄앵란씨는 놀랍게도 요즘 개량한복 형태의'아리랑 드레스'를 처음 선보여 유행을 이끌었다. 여러 아시아 영화제에서 양팔을 드러낸 서양식 드레스를 최초로 입고 간 것도 그녀였다고 한다.

사실은 그녀가 영화제에서 서양식 드레스로 입게 된 데는 재미있는 뒷이야기가 있다.

당시 영화제에서 배우들은 대부분 전통의상을 입었다. 일본배우는 기모노를, 필리핀 배우는 어깨가 강조된 전통드레스를, 중국배우는 몸매를 강조한 전통 실크드레스를 입었다.

처음 해외 나들이인 홍콩 영화제에 가면서 그녀를 포함한 한국 여배우들은'께끼'라고 부르는 원단의 여름 한복을 입었다. 그런데 화려한 한복으로 아름다움을 뽐내던 한국 배우들을 주위 사람들이 힐끗 쳐다보며 이상한 표정들을 지었다. 홍콩의 무더운 날씨에 풀 먹인 한복에서 단체로 쉰내가 심하게 났던 것이었다.

그 이후 해외 영화제를 위해서 엄앵란씨는 다른 여배우들과 치열한 경쟁을 하며, 열벌에서 열두벌의 드레스를 미리 준비했다. 영화제 기간 동안은 다음 영화 의상을 위한 원단과 소품을 구입하기 위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니 영화와 패션에 대한 그녀의 열정에 디자이너의 한 사람으로서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그녀는 수많은 청춘영화에서 60년대 젊은이들의 유행을 선도했는데, 당시 그녀가 가장 히트시킨 패션은 단연 '햅번룩'이다.

그녀가 유행시킨 아이템은 꽃무늬 손수건과 통이 좁은 맘보팬츠, 빨간 스웨이드 플랫 슈즈 등이다. 여기에 흰색과 핑크의 줄무늬 셔츠를 허리에 묶어 입은 그녀는 완벽히 우리나라의 '오드리 햅번'이었다. 묶은 셔츠 사이로 배꼽이 보이지 않게 꼭 속옷을 챙겨 입었다는 것이 요즘과 다를 뿐, 당시 19세였던 배우가 현재 72세가 되었지만 '햅번룩' 패션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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