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후지쓰배는 내인생 최대 분수령”

승부사들에겐 언제나 ‘기회’와 ‘위기’가 교차한다. 세계 정상에 섰던 이창호(32)와 박영훈(22)도 예외는 아니다. 오는 7일부터 일본 도쿄에서 속개될 제20회 후지쓰배는 이 두 사람의 기사 인생에 중요한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세계 최다 우승(22회)에 빛나는 이창호는 2005년 3월 제5회 춘란배 제패 이후 2년이 넘도록 한 개의 세계 타이틀도 추가하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중국 창하오(常昊)와 격돌했던 제11회 삼성화재배 결승에선 0대2로 완패했다. 2006년 제10회 삼성화재배 결승 때는 뤄시허(羅洗河)에게 우승컵을 내주었고, 제18회 TV아시아선수권서도 왕시(王檄)에게 져 준우승에 그쳤다.

국내 무대에서도 이창호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1년 전만 해도 5관왕으로 군림하던 그의 왕성(王城)은 현재 왕위와 전자랜드배 2개로 줄었다. 윤준상의 도전을 받은 왕위전은 현재 2대2로 최종국서 연패(連覇) 여부가 결정된다. 전자랜드배 역시 신예 강동윤의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고 있다. 중요 대국서 무너지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를 둘러싼 ‘건강 이상’설이 파다하다.

이창호에게 이번 후지쓰배는 주변의 이 같은 우려를 한 방에 잠재울 수 있는 찬스다. 7일 준결승에 이어 9일 결승 관문까지 넘어 우승컵을 들어올린다면 다시 세계적 스타의 위용을 되찾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창하오, 후야오위(胡耀宇) 등 중국 강호들을 물리친 이창호의 준결승 상대는 장쉬. 일본의 실질적 최강자라곤 하지만 통산 전적에서 이창호가 3승 2패로 앞서있다. 96년과 98년에 이어 후지쓰배 세 번째 사냥을 향한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이유다.

박영훈 역시 이번 후지쓰배가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불과 8년 남짓한 기사생활 동안 그는 발군의 활약 속에 국내 4강의 일각으로 자리를 굳혔다. 금년 초엔 라이벌 최철한의 도전을 뿌리치고 기성 타이틀 3기 연속 우승을 일궈냈다. 최연소, 최단 기간 九단 진급과 농심배 바둑리그 등 국내외 각종 대회서 박영훈이 걸어온 길은 누구 못지않게 화려하다.

하지만 박영훈은 현재 도약이냐, 정체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 2004년 후지쓰배, 2005년 중환배 제패 이후 2년여 동안 국제 무대에서 더 이상 건져 올린 수확물이 없다. 국내에서도 한때 5관왕을 질주하던 그의 지분은 현재 기성 1개로 줄었다. 후배들의 맹추격은 갈수록 매서워지고 있다.

이 시점에서 후지쓰배를 손아귀에 넣는다면 새로운 추진력을 얻는 계기가 될 만하다. 예감도 좋다. 일본 요코다(橫田茂昭)에 이어 천적으로 꼽히던 중국 저우허양(周鶴洋)을 제치고 4강에 올랐다. 준결승 상대인 요다(依田紀基)와는 두 판을 겨뤄 두 판 모두 1집반씩을 이긴 전력이 있다. 3년 전 후지쓰배 우승 감격의 재현이 꿈만은 아니다.

올해 후지쓰배는 주최국 일본이 모처럼 선전하면서 한·일전의 양상 속에 우승자가 가려진다. 이번에도 한국이 우승한다면 무려 10연패(連覇)째다. 국제대회 사상 유례없는 기록이다. 이창호와 박영훈 둘 중 누가 그 대업을 완성해줄까. 1500만엔(약 1억1000만원)의 전리품을 들고 개선하는 기사는 둘 중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