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같은 삶 동화같은 그림

‘나는 잃어버리지도 않은 것을 찾고 있다.’ 재독화가 노은님(61)은 최근 낸 시화집 ‘물소리, 새소리’(나무와 숲)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나한테는 그림이 시(詩)이고 시가 그림이에요.” 무심하게 내뱉는 그의 말투는 듣기 편하다. 과감하게 생략한 그의 그림도 보기 편하다. 소설가 공지영이 쓴 것처럼 노은님은 “만만치 않은 인생의 신산을 겪어낸 사람”이지만 “그녀의 그림처럼 둥근 사람”이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 ‘물소리, 새소리’를 여는 노은님을 만났다. 그는 한지나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 등 혼합재료로 굵은 선을 쓱쓱 그어서 꽃, 물고기, 새를 그린다. 쉽게 그린 듯 보이지만 “색을 칠하고 또 칠하고 여러 번 공들인 것”이라 했다. 그의 그림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과 유머가 가득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물고기와 새들은 꼭 어린아이들 같다. 검은색과 원색으로 명징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독일에서 “동양의 명상을 독일의 표현주의 양식으로 그렸다”는 평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그림처럼 둥글고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노은님은 9남매 중 셋째다. 스물한 살이던 때 어머니를 잃자 간호보조교육을 받고 경기도 포천군 면사무소에서 결핵관리 요원으로 일했고, 1970년에 간호사로 독일 함부르크에 갔다.

“병원 근무시간이 오전 6시부터 오후 1시까지였어요. 일 끝나면 말도 안 통하고 할 일도 없으니 방에서 앉아 그림만 그렸어요. 어느 날 간호장이 내 방에 있는 그림을 보고 병원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어 줬는데 그 때 함부르크의 국립조형예술대학 한스 티만 교수가 와서 보고는 학교에 지원해보라 해서 지원해 합격했지요. 간호사 3년 계약이 끝난 뒤에는 생각도 못했던 미대학생이 돼 그림만 그렸어요.”

79년 학교를 졸업한 뒤 전업작가로 활동했다. 갤러리 현대 박명자 대표는 “79년엔가 화랑 주인들 몇이 파리에 갔더니 백남준 선생이 ‘독일에 노은님이라는 그림 잘 그리는 여자가 있다’고 해 이 작가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공간화랑, 원화랑, 갤러리 현대 등 국내 갤러리와 독일의 여러 갤러리·미술관 등에서 전시를 해왔다. 1990년엔 모교의 교수가 됐고, 만 56세이던 2002년에 같은 학교 교수와 결혼을 했다.

“그림이랑 인연이 맺어지면서 내 인생은 특별해졌어요. 일부러 그렇게 살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내 멋대로 내 생각대로 산다”는 그는 최근 새들과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며 새를 열심히 그린다. 자택은 함부르크에 있지만 독일 남부에 있는 미헬슈타트에 250년 된 성의 일부를 사서 작업실 겸 별장으로 쓴다고 했다. “별장 정원에 새집을 네 개 지어놓았어요. 해바라기 씨랑 잣 씨를 넣어 놓으면 먹이 먹는 재미로 종일 새들이 드나들어요. 오랫동안 새들과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새를 그리게 되네요. 나는 그림 속에서 나를 들여다봐요.” ▶31일까지 갤러리 현대. 무료. (02)734-6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