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피아노 두드리는 소리… “근본을 잊지말라”

독일의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을 이끌고 있는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Barenboim·65)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사이먼 래틀(Rattle·52)과 함께 ‘세계 오케스트라의 수도’인 베를린을 양분하고 있는 거장입니다. ‘보리수 나무 아래’라는 뜻의 베를린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 있는 이 오페라좌(座)는 250여 년 역사의 명문 오페라 극장입니다.

무대 밑 피트(pit)에서 주로 오페라를 지휘하던 바렌보임이 모처럼 이 극장의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지난 2005년 6~7월 8차례에 걸쳐 베를린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 열렸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 연주회입니다. 최근 이 실황이 마스터클래스를 포함해 DVD 6장 분량으로 출시(EMI)됐습니다.

바렌보임은 이미 10세에 빈과 로마에서 세계 데뷔 연주회를 가졌던, 전형적인 ‘신동’ 출신의 음악가입니다. 20세기 전반 베를린 필을 이끌었던 지휘자 푸르트벵글러는 이미 11세의 바렌보임을 두고 “비범하다”고 불렀지요. 서른 전후에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자신의 지휘와 연주로 녹음한 바렌보임처럼, ‘양수겸장(兩手兼將)’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음악가도 없습니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흔히 ‘피아노의 구약 성서’로 불린다면, 베토벤의 소나타는 ‘피아노의 신약 성서’로 꼽힙니다. 빼어난 피아니스트인 바렌보임 자신도 두 달 간 8차례에 걸쳐 32곡을 완주(完奏)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곡이 끝나고 청중의 박수가 쏟아져도 무대 뒤로 퇴장하지 않고, 곧바로 다음 곡을 연주하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바렌보임은 이 실황을 통해 베토벤의 소나타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던 고정 관념을 처음부터 되묻습니다. 소나타 8번 ‘비창’, 14번 ‘월광’, 17번 ‘템페스트’와 23번 ‘열정’까지, 작품에 붙어있는 수많은 부제(副題)와 별명 때문에 우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에 쉽게 빠져듭니다. 팝 음악에서 너무나 자주 인용한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에서 바렌보임은 선율에 붙어있는 낭만성을 과감하게 절제(切除)합니다. 뒤이은 3악장에서도 그는 기교 자체에 함몰되기 쉬운 함정에서 벗어나려 애씁니다.

그가 신동에서 거장으로, 유대계 음악인에서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꿈꾸는 지성으로 끊임 없이 변화할 수 있었던 동력(動力)도 어쩌면 ‘근본부터 질문하기’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바렌보임이 그려낸 ‘우리 시대의 베토벤’을 듣노라면, 우리는 삶과 음악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 천천히 되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