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LG배 세계기왕전] 세월의 강물

〈제10보〉(116~138)=94년 만 23세의 나이로 일본 천원에 오를 무렵만 해도 류시훈의 트레이드 마크는 투지였다. 유연하고 계산적인 이창호와 달리 그는 격렬한 몸싸움을 통해 상대를 굴복시키곤 했다. 류시훈이 버텨 앉은 대국실은 언제나 찬바람이 씽씽 불었다. 어린 시절의 그를 본 서봉수가 “승부 끼가 온 얼굴에 가득한 소년”이라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지금의 류시훈에게선 그런 모습이 사라진 듯해 안타깝다.

116은 선수(先手)를 뽑겠다는 뜻으로 정수. 반대쪽을 젖히면 참고도가 예상되는데, 이 그림은 좌하귀 쪽 백 전체가 미생(未生)으로 쫓길 가능성이 있어 손을 빼기 힘들다. 119를 차지해 부분적으론 손실이 컸지만 120이 또한 좋아 백의 만족이다. 127 이하 134까지 중앙은 언제건 이렇게 정리될 곳. 135, 137도 이상했다. ‘가’에 두어 △ 한 점을 잡는 게 훨씬 더 컸다. 예기(銳氣)와 집중력으로 단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던 류시훈이라곤 보기 힘든 장면. 세월이란 모난 돌을 둥근 조약돌로 다듬어내는 강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계속되는 초읽기 속에서 형세 판단이 안 되는지 그는 꾸준히 판을 메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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