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으로 그린 음악, 대관령 수놓는다

1993년 BBC 방송은 한 영국 화가(畵家)에 대한 50분 길이의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송했다. ‘붓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이라는 방송 제목을 붙였다.

지금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이 된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이끌고 ‘전람회의 그림’(무소르그스키)을 연주했다. 화가는 그 음악에 맞춰 붓으로 ‘유리 캔버스’에 갖가지 물감을 뒤섞고 입김을 불어넣고 캔버스를 기울이며 실시간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빚어냈다. 이날은 ‘붓’이 오케스트라의 협연자가 된 셈이었다. 협연자는 ‘붓으로 음악을 만드는 연주자’로 불리는 영국 출신의 화가 노만 페리맨(Perryman)이었다.

페리맨이 올해 4회를 맞은 대관령국제음악제의 9일 개막 연주회에서 붓으로 음악을 빚어낸다. 미국 작곡가 어거스타 리드 토머스의 신작(新作) ‘아련한 기억 속의 속삭임’을 세종솔로이스츠가 연주하면, 그 음악에 맞춰 실시간으로 대형 스크린에 갖가지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다. 유리에 흐르는 물감들의 조합은 유럽 옛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화려하면서도 때로는 고혹적이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정작 영국 버밍엄 예술학교에서 전공한 건 미술이었다. 1960년대부터 그림과 음악을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작업에 천착했고, 타계한 명(名)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1916~1998)은 “비발디의 ‘사계’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또 하나의 음악”이라고 격려하며, 그에게 ‘붓으로 음악을 만드는 연주자’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1개의 대형 화면과 5개의 유리 캔버스, 20여 개의 물감과 70여 개의 붓이 그가 사용하는 ‘악기’의 전부다. 장비를 설치하고 이동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리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은 쓰지 않는다. 페리맨은 “붓과 악기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 신체의 일부를 확장시킨 것이다. 컴퓨터는 인간의 상상력을 제한시킬 뿐”이라고 말했다.

페리맨은 ‘붓 협연’과는 별도로, 음악인들의 다양한 연주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음악에 영감을 받아서 그린 초상화와 추상화만 500점이 넘는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사라 장(장영주)의 초상화도 버밍엄 심포니홀에 전시돼있다. 페리맨은 “정경화는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릴 만큼 연주 모습이 격렬하면서도 매력적이고, 사라 장은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리허설하던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고 말했다.

대관령국제음악제 기간 동안, 그는 10일 일본 작곡가 도루 다케미쓰의 ‘3개의 영화 음악’을 협연하고, 12일에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회도 연다. 그는 “드럼은 어두운 갈색, 바이올린의 가녀린 소리는 밝은 초록색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소리와 색깔의 연관을 통해 아이들의 예술적 상상력을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연 문의 (033)249-3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