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007 본드걸 섹시 미녀서 강한 여걸로

얼마 전 한 여배우에 대한 뉴스가 인도를 뜨겁게 달궜다. 인도 출신 ‘본드걸’(bond girl) 탄생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주인공은 인도를 대표하는 여배우 실바 세티(Shetty).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벌써 인도를 비롯해 영국, 미국 할리우드 등 각종 해외 언론엔 그녀에 관한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62년부터 2006년까지 21편의 시리즈를 완성하며 40여년 동안 전세계 누적관객 20억명의 기록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

대체 그들은 왜 ‘본드걸’에 집착하는 것일까. ‘팜므 파탈’적인 성적 코드가 그녀들의 전부였을까. 그녀들은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를 더욱 빛나게 해주기 위한 양념일 뿐이었을까. 제임스 본드의 ‘그녀’들을 만나본다.

◆기억의 저편…초기 본드걸

1960년대 섹시 스타로 명성을 날렸던 우르술라 앤드레스(Andress). 1962년작 ‘닥터 노(Dr.No)’에서 섹시한 본드걸로 처음 사람들 앞에 ‘본드걸’ 이미지를 심어줬다. 수영복을 입고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리듬감 있게 걷는 모습은 본드걸 역사상 가장 관능적인 장면으로 꼽힌다. 이 장면은 2002년 ‘어나더 데이’에서 본드걸을 맡은 할리 베리가 주황색의 아찔한 수영복을 입고 ‘오마주(존경)’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마를린 먼로’ 풍의 육감적인 스타일은 ‘미인대회 출신’ 계열로 이어진다. 두번째 영화 ‘007 위기일발(From Russia With Love)’에 출연했던 다니엘라 비앙키(Bianchi)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스 유니버스 2위를 기록한 인물. 4편 ‘선더볼’(1965)에 출연했던 클로딘 오게르(Auger)는 미스 프랑스 타이틀을 거머쥔 전력이 있다.

예쁘고, 섹시한, 남성들의 로망. 바람둥이 제임스 본드와 뜨거운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그녀들의 모습은 영화적 ‘맛’을 살리는 데 양념 역할로 비쳤다. 때문에 이런 여성상은 줄곧 페미니스트들의 공격 대상이 되곤 했다. 70년대 페미니즘 활동이 고개를 들면서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본드걸’이 여성상을 높이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본드걸=창녀’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90년대 이후-강한 본드걸

95년 ‘007 살인면허’를 시작으로 영국 출신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이 제임스 본드 역을 맡으면서 본드걸의 지위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무엇보다 단지 섹시한 것만이 아니라, 똑똑하고 강해졌다는 것. 또 2명의 여성이 본드걸 타이틀 롤을 맡는 것이 보편화 됐는데 본드걸 역할 수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여성과 본드걸의 반대편에 서 본드걸을 망치려는 적대적인 여성상도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97년 ‘투모로우 네버 다이즈’가 본드걸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 본드걸을 맡은 테리 해처와 웨이 린(양자경)이 그들이다.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총을 들고 제임스 본드 뒤에 서있는 포즈. 당시 슈퍼맨을 그린 TV 시리즈 ‘로이스 & 클락’의 여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렸던 테리 해처는 이 영화를 통해 지적인 이미지를 높였고, 최근엔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예스마담’ 시리즈로 이미 많은 국내외 팬을 가진 양자경은 여기서 중국 특수 정보요원으로 변신해 특유의 액션을 보여준다. 99년작 ‘언리미티드’에선 80~90년대 남성팬들의 마음을 뒤 흔들어놓았던 소피 마르소(Marceau)가 악녀 엘렉트라 킹으로 연기 변신을 했고, ‘와일드 씽’에서 섹시한 글래머 스타로 인기 몰이한 데니스 리차즈(Richards)가 핵무기 전문가 존스 박사 역을 소화했다. 무엇보다 신세대 본드걸로 가장 유명한 건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출신의 할리 베리. 2002년작 ‘어나더 데이’에서 CIA 특수요원 역할을 맡아 지적이며 관능적인 신세대 본드걸의 역할을 창조했다.

2006년 시리즈 ‘카지노 로얄’을 제작하면서 섹시하면서도 강한 여성의 대명사인 안젤리나 졸리, 제시카 알바 등이 가장 유력한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재의 ‘본드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할리우드 칼럼니스트들은 “이전처럼 ‘예쁘기만 하고 명성은 그리 높지 않은’ 미인대회 출신들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본드걸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영화 속 ‘양념’이 아닌, 주인공 제임스 본드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역할로 그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녀들은 모두 성공했을까?

초기 ‘본드걸’이 섹시하기만 했을 뿐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것처럼 그녀들의 필모그래피(filmography·작품목록)도 화려함에 비해 큰 인상을 주지 못한다.

그 중 예외가 있다면 007시리즈 번외편에 출연한 킴 베이싱어(Basinger). 007 시리즈는 보통 21편의 공식작품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식 제작사인 EON을 통해 제작된 것이 아닌 다른 제작사를 통해 제작된 작품도 3편이나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 가장 섹시한 제임스 본드로 꼽히는 숀 코너리와 호흡을 맞춘 킴 베이싱어가 이 작품을 통해 대형 스타로 클 수 있었다. 이 전까지만 해도 금발에 얼굴만 예쁜 여성일 뿐이었던 베이싱어는 영화 출연과 동시에 ‘플레이보이’ 지 표지를 장식하며 가장 관능적인 여성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른 여배우들이 뚜렷한 공적 없이 은막에서 사라졌던 것에 비해 그녀는 86년 ‘나인 하프 위크’, 89년 ‘배트맨’등을 통해 섹시스타로 확실히 각인시켰고, 88년 ‘새 엄마는 외계인’, 97년 ‘LA 컨피덴셜’ 등 코믹에서 스릴러까지 굵직굵직한 연기 변신을 거쳐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로 떴다.

킴 베이싱어를 제외하곤 미국 여배우들이 그다지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한 데 반해 미국 외 출신 여배우들은 나름대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69년작 ‘007 여왕 폐하 대작전’ 에 출연한 다이아나 리그(Rigg)와 73년작 ‘라이 앤 렛 다이’에 출연한 제인 세이무어(Seymour)는 탁월한 연기력으로 원로 배우로 이름을 남기며 영국 여왕으로부터 훈장(OBE)를 받기도 했다. 81년 ‘유어 아이즈 온리’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프랑스 출신 여배우 캐롤 부케(Bouquet) 역시 007 시리즈 출연 이후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했다.